Focus

2014 석학 초청 특강 ‘21세기에 다시 보는 독립사상 ④’

2014-06-12 교육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독립’ 주제
“독립운동은 나라를 굳건하게 하는 운동, 교육 통해 가능”

경희대학교는 이정식 경희대 석좌교수(Eminent Scholar) 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를 초청, 4월 29일부터 4차례에 걸쳐 서울캠퍼스 청운관 B117에서 ‘2014 석학 초청 특강’을 개최했다. ‘석학 초청 특강’은 경희대학교가 국내외 석학과 전문가, 실천인을 강사로 초빙해 국가와 인류사회의 더 큰 미래를 모색하는 ‘성찰과 창조’의 장이다. 이정식 교수는 이번 석학 초청 특강에서 ‘21세기에 다시 보는 독립사상’을 주제로, 한국의 독립사상이 중국 중화(中華)질서와 일제 식민 통치에 맞서 어떤 진화의 여정을 열었는지 되짚으며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길을 제시했다.

5월 13일 열린 마지막 강연에서 이정식 교수는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제로 21세기 오늘날의 시각으로 독립운동의 여러 노선들이 거둔 성과와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고찰하고, 그 후에 어떻게 독립으로 이어졌는지 들려줬다.

일제 탄압 속에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 일어나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이정식 교수는 1884년 12월 4일 일어난 갑신정변 이후 국제정세를 설명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두고 청나라와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1894년에는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를 제압한 일본은 요동반도 등을 얻게 됐다. 만주와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해 남하정책을 추진 중이던 러시아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만주 진출을 저지했다. 그 후, 일본은 군사력을 키웠고, 1904년에는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러일전쟁을 치렀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정치·군사·경제상의 우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이정식 교수는 “일본은 조선을 개혁시켜 새로운 이웃으로 거듭나게 도울 수도 있었지만, 제국주의를 선택했다”며 “국력이 약했던 한국은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고, 1910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게 됐다”고 말했다.

이정식 교수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고 말한 뒤, 독립운동을 크게 무장투쟁, 사상투쟁, 겨레의 힘을 기르려는 실력양성, 그리고 외교활동으로 나눴다. 그는 첫 번째로 무장투쟁에 대해 설명했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활동한 의병은 일제의 탄압에 밀려 점차 북상했고, 이것이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국외 항일운동세력은 국제 사회에 일제의 조선 강점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펼치고,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그것이 3·1운동이다. 이정식 교수는 3·1운동은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3·1운동 이후 중국에서는 사상가, 혁명가, 정치가인 천두슈가 3·1운동에 감명받았다는 글을 신문에 게재하는 등 여러 혁명가가 학생들의 항일과 혁명을 독려했다”고 설명한 이 교수는 “이 같은 노력은 5·4운동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만주·상하이 등 타국에서 무장투쟁 이어가
3·1운동 이후 만주를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이 계속됐다. 이정식 교수는 “나라가 있을 때도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막지 못했는데, 나라가 없어진 후에 타국에서 무력항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청산리대첩과 같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타국에서의 무장투쟁의 최후는 비참했다. 일본과 러시아가 협약해 한국 독립군을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1921년 자유시참변이 발생,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1930년대에는 중국공산당을 도와 일본 토벌에 참여했으나 민생단과 관련된 일본 첩자라는 혐의를 받아 중국공산당에 의해 숙청당했다. 이 사건들로 게릴라 항일투쟁 세력은 급격히 약화됐다.

또 다른 무장투쟁 활동으로 이정식 교수는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꼽았다. 임시정부는 연통제를 통해 국내와 연결하며 독립운동을 펼쳤고,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발행해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활동을 국내외에 알렸으나, 내분이 발생해 1920년대 후반에는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전락했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1932년 김구와 윤봉길이 일으킨 상하이 홍구공원 폭탄의거를 계기로 되살아났다.

무장투쟁·일제 탄압 알리는 활동·임시정부 노력으로 독립 실현
독립투사들은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살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미국에서 배포하는 등 일제 탄압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국내에서도 <독립신문> 등을 통해 국민의 계몽과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이 펼쳐졌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1895년 조선으로 돌아와 이듬해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이정식 교수는 “서재필 선생은 10여 년간 미국에 머물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며 “그가 <독립신문>을 발행한 이유는 국민을 계몽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 교수는 “‘누가 독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는가’라고 묻는다면 무장투쟁, 일제의 탄압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홍보 활동, 임시정부의 노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1943년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발표됐다.

마지막으로 이정식 교수는 “1957년부터 독립운동을 연구했는데, 사회주의계열의 운동도 독립운동이라고 발표했더니 큰 파장이 일었다”며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대립적으로 간주하던 한국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에서는 무장투쟁과 김구에 대한 업적은 고평가된 반면, 서재필, 이승만의 활동은 폄하되고 있다”면서 “역사에 의문을 갖고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근현대사를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이정식 교수는 교육의 중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은 나라를 굳건하게 하는 운동”이라는 생각을 밝힌 그는 오늘날 한국이 발전하게 된 원동력은 교육이라고 강조한 뒤, “독립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고, 한국의 발전을 되돌아본다면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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