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슬라보예 지젝 특강 ①

2013-10-10 교육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 기회 제공
한국 사회 힐링 열풍에 "때로는 상처도 필요"

세계적 철학가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특강이 지난 9월 24일부터 26일까지 경희대학교에서 개최됐다. 9월 24일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첫 번째 특강에서 지젝은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실체를 분석하고 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제시했다. 이날 3,500여 명의 청중이 몰려 좌석을 가득 채웠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지젝은 헤겔과 라캉, 마르크스의 이론을 기반으로 사회현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비판이론가다. 경희대학교는 지난 7월 지젝을 외국어대학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에미넌트 스칼라(Eminent Scholar)로 임용한 바 있다.

인지적 지도 그리기의 기회 박탈한 자본주의
지젝은 일제강점기를 거친 한국이 일본의 만행으로 인한 상처를 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에 대해 언급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크게 노력하는 태도를 '포스트모던적 태도’라고 지칭한 지젝은 "지금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포스트모던적 태도가 주를 이루고 있다고 들었다"고 말한 뒤, "상처는 완전히 극복될 수 없을 뿐더러 반드시 치유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고립됐다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지젝은 이어 이탈리아 사회비평가 프랑코 베라르디가 자신의 책에서 한국에 대해 비판한 내용을 소개했다. 베라르디는 한국이 전쟁의 흔적들로 황폐화된 환경에서 그 어느 문화권보다 자연스럽게 디지털 시대로 전환하면서, 삶의 많은 부분이 개선되면서 한편으로는 일상생활의 사막화와 극단적 개인화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지젝은 "베라르디가 묘사한 한국의 모습은 '세계 없음’이라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나치의 반 유대주의에서도 적을 상정하고 유태인 음모론을 제기하고 목표와 이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등 일종의 인지적 지도 그리기를 하는 '세계’가 있었다"면서 "그런데 자본주의는 글로벌하긴 하지만 사실상 '세계 없음’의 이데올로기를 그려내고 있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의미 있는 인지적 지도 그리기를 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글로벌 자본주의 자체의 존재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 지젝은 "유럽이 수백 년 동안 사회적 담론을 통해 근대화 작업을 진행한 것과 달리 무슬림 사회는 매우 짧은 시간에 어떤 보호막도 없이 자본주의가 적용돼 그들이 유지해 온 상징적인 우주 자체가 침범당하고 이것을 대체할 근간을 만들지 못했다"면서, "그러다 보니 일부 아랍국가에서는 자신들의 문화가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신병적이고 배타적인 종교를 재주장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요구됐다"고 말했다. 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신근본주의는 초자아(슈퍼에고)의 부상이라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나친 관용성과 비슷하다.

'공적 영역의 사유화’ 우려
지젝은 이날 "우리 삶의 디지털화로 인해 공적인 이성의 공간이 사유화 돼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과 사적인 사용을 모순적으로 설명한 칸트의 글을 소개하며 "칸트에게 있어 국가기관, 국가 관료주의는 어떤 특정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적인 것이 아닌 사적인 것이며 집단적 사적 이해에 제한 받지 않고,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철학과 과학 같은 이성의 영역이 공적인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국가 기관들의 감시 행위를 폭로한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언 어산지, 전 미 중앙정보국(CI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 전 미군 일병 첼시 매닝 등 내부고발자들은 공적 공간을 보호한다"고 밝힌 지젝은 "민간기업과 공공기관 모두 부정행위를 폭로할 수 있는 내부고발자들이 필요하며 민간 차원에서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지젝은 "경희대가 여전히 인문학을 강조하는 몇 안 되는 대학이라는 점에서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한 뒤, "최근 유럽에서는 불필요한 일을 하는 철학자는 필요 없고 실제로 유용한 지식을 가져다 줄 과학이 필요하다면서 철학과 과학을 이성의 사적인 이용에 종속시키는 고등교육 개혁을 진행하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사회적 다이내믹을 살펴보면 아주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변화가 촉발돼 아주 큰 산사태 같은 거대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라는 말로 지젝은 강연을 마무리했다.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청중은 자유, 민족주의, 플라토닉러브 등에 관한 그의 견해를 물었다. "사람은 언제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에 그는 "주어진 선택 안에서 뭔가를 정하는 것이 아닌, 어디에서부터 선택을 할지 그 근본부터 내가 선택할 수 있을 때, 예전에 없었던 가능성까지 내가 제기할 수 있을 때"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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