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사회 문제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과 선입견 경계하는 자세 배워”
2020-06-17 교육
2020-1 세계시민교육 사례 (2) 디지털 성범죄 예방 및 대처 방안 알리기 활동
문헌 조사, 전문가 인터뷰 토대로 디지털 성범죄 관련 매뉴얼·카드뉴스 제작
“누군가에게 벌어지고 있는 문제, 자기 일처럼 여겨야”
국내 대학 최초로 후마니타스칼리지가 실시해온 ‘시민교육’이 지난해 ‘세계시민교육(Global Citizenship Education)’으로 거듭났다. 국내 대학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세계시민교육을 개설, 운영하는 것은 경희대가 최초다. 세계시민교육은 실험이나 실습이 아니라 ‘실천’이다. 학생들은 이론을 공부한 후 강의실 밖으로 나가 현장 활동을 수행한다. 현장 활동의 주제, 활동 방식은 모두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시나리오가 없는 현장에서 온몸으로 경험하는 ‘산 공부’의 폭과 깊이는 각별하다.
2020학년도 1학기 학생들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확산 우려로 비대면 강의를 들으며 온·오프라인에서 활동을 펼쳤다. 코로나19에 따른 피해 복구 돕기, 디지털 성범죄 예방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지속가능한 인류사회를 위한 활동을 수행하고, 세계시민의 역할과 책임을 배웠다. 이번 학기 학생들이 수행하고 있는 세계시민교육 활동 내용을 전한다.<편집자 주>
지난해 11월 ‘텔레그램 n번방·박사방 사건’이 알려지며 대한민국이 큰 충격에 빠졌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 착취 영상을 메신저를 통해 대대적으로 공유·판매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다. 피해자 중에는 미성년자가 대거 포함돼 있어 국민의 공분을 샀다. ‘박사’ 조주빈, n번방 개설자 ‘갓갓’ 문형욱이 검거됐고, 500만 명 이상이 청원에 동참해 ‘n번방 방지법’이 통과될 만큼 디지털 성범죄 단죄 여론이 높아졌지만, 디지털 성범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목표로 세계와 시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삼지원 원봉근’ 팀을 서면으로 만났다. 20학번 우주과학과 김지원, 도예학과 염지원, 주지원, 기계공학과 최봉근 학생이 모인 삼지원 원봉근 팀은 “기술 발전에 따라 범죄 형태가 다양해졌지만, 이를 예방 혹은 대처할 방안이 빠르게 만들어지지 않아 디지털 성범죄 정도가 더 심각해졌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라며 “범죄의 심각성에 상응하는 형량을 주는 것이 불가한 것도 문제”라고 프로젝트의 시작을 언급했다.
팀원들은 “디지털 성범죄 피의자, 피해자 중 적지 않은 인원이 미성년자라는 것을 볼 때 제대로 된 성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피해자를 향한 비판,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해 격화되는 젠더 갈등도 문제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논의를 토대로 더 많은 사람에게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심어주고, 성적 자기 결정권의 중요성 및 성범죄 피해자가 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도움을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익명성과 공연성을 기반으로 등장한 디지털 성범죄
삼지원 원봉근 팀은 먼저 논문, 기사 등 문헌을 살펴보며 디지털 성범죄의 개념과 특징, 문제점을 확인했다. 디지털 성범죄는 카메라 등의 매체를 이용해 다른 사람의 신체를 동의 없이 촬영하거나 이를 유포해 성적으로 괴롭히는 행위를 말한다. 팀원들은 “사이버 공간의 비대면 관계와 익명성을 전제로 하며, 불법촬영물의 실시간 공유, 감상, 비평은 공연성을 증대시킨다”라고 강조했다.
김지원 학생은 “디지털 성범죄의 특징 중 하나는 언제든 불법촬영물 유포가 가능하고,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다는 것이다”라며 “이 때문에 피해자는 대응이 어렵고, 지속적으로 피해를 본다. 또한 디지털 성범죄의 가해 가능성이 또 하나의 젠더 권력이 된다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팀원들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빠른 대응 및 적극적 지원이 필수라고 판단하고, 현재 어떤 방식으로 대응 및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지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기로 했다. 한국여성의전화 손문숙 팀장과 약 2시간 정도 인터뷰하며 디지털 성범죄 대처와 관련된 입법의 공백이나, 제도적인 지원 사항을 확인했다.
디지털 성범죄 관련법의 허점 및 성적 자기 결정권의 중요성 확인
디지털 성범죄 수법은 갈수록 치밀해지는데 관련법이 없어 처벌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많은 단체가 입법의 사각지대를 알리고 있다. 염지원 학생은 “손문숙 팀장님과 인터뷰하며 전기통신사업법 제22조의5(부가통신사업자의 불법촬영물 등 유통방지)의 경우, 현재 이미지와 영상물만 삭제 대상에 해당돼, ‘○○녀’와 같은 수치심을 줄 수 있는 텍스트가 담긴 게시물은 삭제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의2(허위영상물 등의 반포등)는 수치심을 주는 합성사진의 경우 처벌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사진 옆에 수치심을 줄 수 있는 사진을 같이 게시할 경우, 아무런 처벌을 할 수 없다는 법의 허점도 확인했다.
제도문제 외에도,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주지원 학생은 “성적 자기 결정권은 개인이 사회적 관행이나 타인에게 강요받지 않고 자율적이고 책임 있게 자신의 성적 행동을 결정할 권리를 뜻한다. 이는 자기 결정의 책임을 전제로 하는데, 자신과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일이 필요하다”라며 “신체 접촉에 관한 기준을 확립하는 데 성적 자기 결정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와 관련한 성교육의 필요성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선입견 바로잡아야
피해자 및 피해자 주변인의 디지털 성범죄 대처방식의 문제점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다. 최봉근 학생은 “가해자가 협박했을 때 피해자는 겁을 먹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해 성범죄가 지속되고 강도가 심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라며 “이럴 때 가해자에게 휘둘리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중요한데, 많은 피해자가 수치심 때문에 알리기를 꺼려 피해가 계속된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주변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게 팀원들의 생각이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렸을 때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다독이며, 범죄가 지속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주변인으로서 적절한 대처 방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피해자가 주변의 반응이 두려워 도움을 요청하려면 큰 용기를 내야 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러한 이유로 팀원들은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선입견을 바로잡기 위한 활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주변인에게 알려질 걱정 없이 상담받을 수 있고, 현재 피해자를 위한 의료 지원, 변호사 지원, 삭제 지원 등 여러 방안이 마련돼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피해자가 적절한 대처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삼지원 원봉근 팀은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심어줄 수 있는 쪽글을 제작하기로 했다. 김지원 학생은 “디지털 성범죄 예방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순 없지만,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2차 가해를 막고, 서로의 입장을 존중해 젠더 갈등을 완화시키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또한 성범죄 피해 예방을 위한 매뉴얼을 제작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적인 성교육이 성범죄를 막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어릴 때부터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지시켜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성범죄를 예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성범죄 피해자가 가명으로 가해자를 고소할 수 있다는 것, 미성년자가 피해 사실을 주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국여성의전화로부터 충분한 상담과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여러 단체가 피해자의 진술을 믿고 도와주리라는 것 등의 정보를 전달해 성범죄 피해가 일어나더라도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기로 했다. 팀원들은 배포하기 쉬운 카드뉴스 형식으로 성교육 매뉴얼을 제작하고, 배포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피해자에게 현실적인 도움 주길 기대
종강을 앞둔 지금도 삼지원 원봉근 팀은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어려움은 없었을까. 코로나19 탓에 만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팀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글 드라이브를 활용, 팀원 모두가 실시간으로 문서를 수정하며 의견을 나눴고, 복잡한 내용은 그룹콜로 회의를 진행했다. 인터뷰도 쉽지 않았다. 여러 단체에서 거절 의사를 표시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국여성의전화와 일정을 맞춰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전문적인 정보를 검색하고, 직접 현장에 가보며 문제를 더 현실감 있게 바라볼 수 있었다는 염지원 학생은 “다양한 제도적인 지원, 입법의 공백 등 하나의 사안을 섬세히 바라보고 늘 경계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라고 언급했다.
최봉근 학생은 “인터뷰를 통해 제도적으로 피해자를 도울 수 있는 방안은 많지만, 피해자가 그것을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며 “지금도 한국여성의전화는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최대한 알리고 있다. 여기에 우리 팀의 노력이 더해져 더 많은 사람이 어떤 제도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고, 필요한 때에 적절히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삼지원 원봉근 팀에게 세계시민은 ‘누군가에게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무심코 지나치지 않는 사람, 이를 자신의 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팀원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서 노력하는 자세를 배웠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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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은지 sloweunz@khu.ac.kr
ⓒ 경희대학교 커뮤니케이션센터 communication@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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