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인류 위해 일하고, 평화 위해 싸우세”
2020-05-08 교류/실천
개교기념(1) 경희대학교 창학 배경과 역사
교시 ‘문화세계의 창조’, 인간 본질에 관한 물음에서 탄생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세계를 꿈꾸며 평화로운 지구사회, 풍요로운 미래문명 창달
1949년, 경희의 역사가 시작된 해이다. 경희는 1년 후, 6·25 전쟁의 총성과 함께 피란길에 올랐다. 1951년 부산 동광동 판자 교사 3채에서 학생 120명, 교직원 6명과 새 출발을 알렸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한반도, 모든 것이 어렵고 힘겹기만 했던 신생 대학. 그 어려움 속에서도 경희는 무에서 유의 역사를 창조했다. 오늘날 경희는 학생 3만 4,016명, 교수 1,434명, 직원 428명이 함께하는 명문사학으로 성장했다. 이 역사의 배경엔 경희정신이 있다. ‘대학다운 미래대학 건설’을 위한 소명의식이 있다. 경희는 그 다짐을 이렇게 노래한다. “온오한 학술연구 온갖 노력 바치고 변전하는 세계의 진리를 연구하여··· 인류 위해 일하고, 평화 위해 싸우세.” 5월 18일 경희대학교 개교기념일을 맞아 경희정신과 미래비전을 되새긴다. 그 첫 번째로 창학 배경과 역사를 살펴본다.<편집자 주>
‘교육의 힘으로 나라를 세우겠다’
경희대학교의 연원은 1949년 5월 설립된 신흥초급대학(2년제 가인가)이다. 이 대학은 이듬해 6·25 전쟁과 심각한 운영난에 처하며 존폐 위기를 맞았다. 경희학원 설립자 조영식 박사는 ‘교육의 힘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교육입국, 敎育立國)’는 뜻을 품고,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했다. 1951년 5월 18일의 일이다. 이날이 경희대학교 개교기념일이다.
조영식 박사는 인간성이 말살되는 전쟁 한가운데서 삶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이 돼야 하는가를 성찰하고, <문화세계(文化世界)의 창조(創造)>(1951년 발행)를 집필했다. ‘전쟁도 파괴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무엇인가.’ 그 물음 속에서 조영식 박사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자연 규범’이 아니라 보편의지에 입각한 ‘문화 규범’으로 정신과 물질이 조화된 보편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평화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힘은 ‘교육’에 있다고 봤다.
조영식 박사는 ‘문화세계의 창조’를 교시로 삼아 생명과 우주, 역사와 문명의 격동 속에서 인간적인 삶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사유하고 실천토록 했다.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세계’를 꿈꾸며 평화로운 지구사회, 풍요로운 미래문명을 창달하는 것이 경희의 창학정신이다.
피란지 부산에서 발아한 경희의 창학이념, 서울캠퍼스에서 개화
경희는 부산 동광동에 임시 교사를 지어 1951년 8월 20일, 신입생을 맞이했다. 1952년 12월에는 4년제 대학 설립 인가를 획득한 데 이어 종합대학교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1953년 1월, 화재로 동광동 교사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해 봄 부산 동대신동에 교사를 다시 건립했지만, 바로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이듬해인 1954년 3월 24일 경희는 서울 회기동으로 이전했다. 세 채의 임시 교사를 지었다. 대학원(현 신문방송국)과 임시 사무실(중앙도서관 옆 봉수대 자리) 그리고 목조 임시 교사(현 문과대)가 건물의 전부였다. 그해 4월 15일 임시 교사에서 첫 개강식을 열었다.
부산캠퍼스 시대를 마감하고, 세계적인 대학원(大學園)의 꿈을 펼칠 서울캠퍼스 시대가 개막됐다. 피란지 부산에서 발아한 경희의 창학이념 ‘문화세계의 창조’와 교훈 ‘학원의 민주화, 사상의 민주화, 생활의 민주화’가 고황산 기슭에 뿌리를 내리고 개화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대학’을 향한 비전 선언
경희는 서울캠퍼스 시대를 열면서 ‘세계적인 대학’을 향한 담대한 비전을 선언했다. 1954년 5월 20일, 조영식 박사는 학장(이듬해 종합대학으로 승격됐기 때문에 당시에는 총장직이 없었다) 취임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것은 한국의 어느 대학보다도 동양적이요, 세계적으로 내놔서 첫째가는 제일 대학과 경쟁해야 되겠다. (···)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우리 손에 의해서 결정지어지는 것이지, 우리 손에 의해서 해석되는 것이기 때문에 (···) 우리의 목표를 지향해서 (함께 노력한다면) (···)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한 번 더 기억하면서 여러분들한테 부탁합니다.”
1954년 당시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에 불과했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그것도 단순한 최빈국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치열한 전쟁을 치러낸 국가인 데다 분단된 상황. 무엇보다 가난과 싸워야 했다. 생존이 급선무였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암울한 시기에 경희는 한반도를 넘어 ‘세계적인 대학’을 향한 미래를 꿈꿨다.
당시 경희는 100년 후 미래를 건설하는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건설 사업도 추진했다. 부산 동대신동 교사를 건축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서울에서 새 캠퍼스를 건설해야 했기에 재정 상황이 어려웠지만,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1954년에 제작된 마스터플랜에서 볼 수 있듯이 정문(등용문), 본관, 중앙도서관 등 대학의 핵심 건물이 처음 설계한 그 모습 그대로 건설됐다.
1960년 ‘경희(慶熙)’로 교명 개명··· 미래의 인류사회를 위한 새로운 문예부흥 선도
“세계 제일 대학을 만들겠다”, “운명은 우리 손에 의해 결정된다”던 조영식 박사의 학장 취임 연설은 이후 하나하나 실현됐다. 초급대학 설립의 법적 인가를 받은 지 불과 3년만인 1955년 2월 28일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이후 경희는 빠른 속도로 성장해 1958년 4월 8일에는 박사 학위 과정을 개설, 종합대학으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갖추게 됐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희 캠퍼스의 틀이 잡혀 나갔다. 마스터플랜에 따른 종합학원 건설 사업이 이어지며 하나의 아름다운 공원과 그 사이사이에 유기적 연관성이 있는 학문의 전당이 하나둘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60년 3월 1일에는 그동안 사용해오던 ‘신흥’에서 ‘경희(慶熙)’로 교명을 개명했다. 인간과 문화의 생성원리, 동적 일원론의 우주론을 결부한 것이 ‘경희’에 담긴 철학적 의미다. 이 뜻과 함께 경희는 ‘동서 문명의 조화와 승화’를 꿈꿨다. 미래의 인류사회를 위한 새로운 문예부흥을 선도하자는 포부를 키웠다.
이름을 바꾼 이후 경희는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1960년 경희중·고등학교 설립으로 유치원에서 대학원까지 교육의 전 과정을 일관된 체제로 묶어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종합학원 설립이 시작됐다. 어릴 때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 경희의 철학과 정신이 담겨 있는 일관된 교육 시스템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교육적 소망에서 비롯된 계획이었다.
경희는 ‘전인교육, 정서교육, 과학교육, 민주교육’을 각급 학교에서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실시하고자 했다. 또한 ‘창의적인 노력, 진취적인 기상, 건설적인 협동’을 통해 자기 발전을 이루고 사회에 기여하는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61년 경희유치원과 경희초등학교가 문을 열면서 마침내 유치원에서 대학원까지 하나의 교육체제를 갖춘 경희학원 체제를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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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오은경 oek8524@khu.ac.kr
ⓒ 경희대학교 커뮤니케이션센터 communication@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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