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기고] 민주주의의 위기와 기회
2020-04-10 교육
코로나19 이후의 미래(2) 정치
코로나19로 만연해진 민주주의 위기론
우리 모두의 전환적 각성과 치열한 노력 필요한 시점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지구촌을 지배해온 획일적 관행과 틀이 깨졌다. 새로운 일상의 기준 즉 ‘뉴 노멀(New Normal)’ 시대가 열린 셈이다. 코로나19가 일으킨 공포감 속에서도 미래에 펼쳐질 혁신적 삶에 대한 기대도 나타나고 있다. 불안을 넘어 미래를 전망해보아야 할 이유다. 이에 코로나19 이후의 삶을 예측하는 전문가 견해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교육, 의학,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측면의 전망을 매주 2회씩 총 3주에 걸쳐 소개한다. 두 번째 주제는 ‘정치’로 임성호 정경대학 교수가 민주주의의 위기론과 변화에 대한 의견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진부한 말이지만 위기는 기회이다.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을 삼켜 버리며 인류사회를 통째로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그러나 이 포악한 괴물의 위협이 커질수록 우리는 그동안의 안이함을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전환을 꿈꾸며 마음을 다지게 된다. 이 점은 사회, 경제, 문화, 모든 영역에 해당하나 특히 정치 영역에서 민주주의와 관련해 품어보는 소망이다.
민주주의의 실패론에 대한 위기의식 만연
민주주의는 이미 여러 갈래의 위기론에 직면하고 있었다. 20세기 말 공산주의 체제가 세계 중심 무대에서 무너지며, 역설적으로 기존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각종 위기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는 화산이 폭발하듯 분출되는 각종 사회적 요구를 공정하게 조정해 효율적으로 정책화하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격렬하게 불붙은 양극적 문화전쟁을 가라앉히고 온건한 중용을 취하는 데도 실패했다.
민주주의가 ‘조화와 균형’보다 ‘갈등과 교착’을 상징하게 됐다고 개탄하는 사람이 늘었다. ‘민주주의가 만병통치약은커녕 유통기한마저 넘긴 위약(僞藥)은 아닐지’하는 의심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 체제는 이제 더 나아갈 데 없는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며 ‘역사의 종언’을 말했던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비판을 넘어 조롱의 대상이 됐다. 심지어 싱가포르의 권위주의 체제나 중국의 개량 공산주의 체제의 상대적 우월성을 말하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가 갑자기 뛰어들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 괴물을 맞아 각국 정부는 혼란 속에 민주주의의 여러 측면을 조금씩 깎아버리는 쪽으로 대응책을 찾고 있다. 시급한 사태를 긴급히 처리해야 한다며 대통령, 수상, 장관 등 행정부의 권력을 과도하게 키우고 국민의 대표자인 입법부 의원의 역할을 위축시키는 나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코로나19 대응하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모습 나타나
영국, 미국 등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그러하니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칙령 선포권 등 비상시에 확대된 행정부의 재량권은 정상적 상황에도 쉽게 원상 복구되지 않는다는 점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법부 기능마저 축소하거나 아예 잠정 중단시킨 나라도 있다. 위기라는 구실로 대통령의 임기를 늘리거나 선거를 연기하는 국가도 나오고 있다. 눈에 안 보이는 바이러스가 퍼질수록 각국 정부는 권력을 눈에 띄게 한쪽으로 집중시키며 권력 분산, 분립, 견제와 균형 등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어려운 시국에 퍼지는 유언비어를 막겠다며 언론매체나 시민단체의 비판에 재갈을 물리고 심지어 일상적인 표현의 자유마저 제약하고 있다. 자칫 정권 유지를 위해 악용될 위험성이 크다.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겠지만, 전 세계에 걸쳐 공공장소에서 여는 집회는 물론 사적 모임마저 통제를 받으며 민주주의가 생동감을 잃고 있다.
국가 간 이동은 물론이고 지역 간 이동도 제한되고 격리자 수가 크게 늘고 있는 가운데, 아무리 조심해도 인권침해의 소지가 커지는 현상을 막기 힘들다. 특히 이주노동자, 난민, 노숙인 등 사회적 약자의 경우가 심하다. 무엇보다 확진자와 격리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빅 브라더’와 같은 거대한 감시망 속에서 관찰당하고 있다는 점이 국민에게 막연한 불안감을 주고 있다. 이 불안감은 체제에 대한 불신감과 냉소주의를 낳으며 민주주의의 역동성이 솟구칠 기회를 막는다.
또 코로나19는 책임 떠넘기기와 희생양 찾기라는 오랜 고질병을 도지게 하며 민주주의 풍토를 황폐화하고 있다. 거의 예외 없이 곳곳에서 국가 간, 정파 간, 지역 간, 사회집단 간의 책임 공방과 공치사 경쟁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특히 외국과 내부의 특정 집단에 탓을 돌리며 비판을 면하거나 위안으로 삼으려는 분위기가 정치권에 만연하다. 민주주의 핵심인 정치적 책임 의식은 오간 데 없다. 일부 시민은 불안함 속에서도 준법정신과 도덕심을 잘 발휘하고 있지만, 그중 일부는 정치권의 부추김에 동요하는 기미를 보인다. 시민의 연대 의식과 개인적 성찰이라는 민주사회의 덕목마저 이런 현상에 잠식되면 심각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반(反)민주주의의 반격, 위기 극복을 위한 과감한 인식 전환 필요
이미 상처 난 민주주의에 코로나19는 치명적일 수 있는 타격을 가했다. 민주주의를 비웃던 양극단의 이념분자나 획일적 위계질서를 예찬하는 권위주의 옹호론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민주주의를 매도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최고로 중시하는 나라 중에 코로나19 사태를 잘 넘긴 경우가 몇 개나 되냐고 물을 것이다. 사회에 자유와 자율성을 보장해주기보다는 일사불란한 통제에 능한 국가가 사태 해결을 훨씬 잘했다고 으스댈 것이다. 움츠러들었던 반(反)민주주의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약 행정 능력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혼동하는 착각과 전자(前者)만 우선시하는 편협함, 애초에 바이러스가 비민주적인 통제사회에서 발생하고 퍼졌다는 사실을 망각한 무지함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지속된다면 정말 큰 문제가 생긴다. 민주주의를 마땅치 않게 보거나 의심하면서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는 최고조의 경고음을 내며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과감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민주주의 지지자인 우리는 기존 체제를 무조건 고수해서는 위기를 벗어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미 이전부터 민주주의 위기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코로나 사태가 위기를 악화시키고 위기론의 설득력을 높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차제에 민주주의의 체질을 근원적으로 바꾸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그동안 민주주의는 너무 개인주의에 함몰돼 있었다. 사회의 파편화와 양극화가 동시에 발생하는 시대환경 속에서 협력보다는 갈등, 조정보다는 교착, 조화보다는 혼란, 균형보다는 편중이 대세가 된 이유는 과도한 개인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개인주의가 과거에는 시대정신으로서 수백 년간 인류 발전을 견인했지만, 전환기의 조류 앞에서 상황이 바뀌었다. 더욱이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개인주의에만 의존해선 민주주의 체제를 잘 운영할 수 없음을 명확히 확인해줬다.
개인주의 넘어설 공동체 가치 되찾고 고양해야
코로나19 외에 또 어떤 바이러스가 인류를 위협할지 알 수 없다. 이제 바이러스 시대를 맞아 개인주의를 희석해줄 공동체 가치를 되찾아 고양해야 할 때다. 나 개인의 근원적 우선성을 인정하지만, 나는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남과 함께 사회를 구성함으로써 존재가치를 갖게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이익과 권리를 앞세우기 마련이지만, 남의 이익과 공동선도 조화롭게 추구해야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다행히 20세기 중후반 이래 학계에서는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여러 민주주의 모델을 탐구해왔다. 참여 민주주의, 숙의 민주주의, 결사체 민주주의, 초국적 민주주의, 성찰적 민주주의 등의 이러한 모델은 개인이 공동체 속에서 공동선을 지향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 점에서 과도한 개인주의에 입각한 기존 민주주의 모델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기존 연구를 더 보완, 발전시키고 이를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도 진지하게 논의하고 받아들여 실행할 과제가 남았다.
특히 코로나19와 같은 돌발변수가 터질 때 개인의 자유, 권리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공동체 가치를 지키기 위해선 민주주의 체제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 기본 틀에 시민적 공동체 정신을 조화롭게 접목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이 난제를 위해 우리 모두의 전환적 각성과 치열한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강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Simmons College 전임강사 직을 거쳐 1996년부터 경희대에 재직하고 있다. 강의로는 정치학방법론, 비교정치론 등을 담당하고, 연구는 미국정치, 의회·선거·정당정치 분야로 집중하고 있다.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장, 교무처장을 역임하였고 국회입법조사처장으로 2년 반 동안 실무경력을 쌓은 후 2017년에 학교로 복귀하였다. 현재 한국풀브라이트동문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글 임성호 정경대학 교수
ⓒ 경희대학교 커뮤니케이션센터 communication@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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