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작은 시골 출신 소년, 세계적 학자 되다
2019-04-29 연구/산학
김종복 영어영문학과 교수, 독일 알렉산더 훔볼트 연구상 수상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 최초, 영어·한국어 언어현상 관한 세계적 수준 연구 인정받아
“교내외 우수한 국내 학자들 세계적 권위의 연구상 가능해”
김종복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어린 시절을 회고할 적마다 상대방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 빛으로 공부했다”는 말을 하면 대부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이로 보나 학자로서 성취로 보나 궁벽한 시골 출신이라 짐작하지 못해서다. 김 교수의 고향은 경상북도 영천시 오류리(五柳里)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팔도를 돌다 버드나무가 많아 쉬어가기 좋은 곳이라며 이름 지었다. 본디는 오지라는 뜻의 ‘오(奧)’자였는데, ‘다섯 오(五)’로 바뀌었다고 한다.
김 교수가 최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 인문사회학자로서는 최초로 독일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재단’이 수여하는 ‘훔볼트 연구상(Humboldt Research Award)’을 수상한 것. 수상자 중 총 5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훔볼트 연구자상은 독일의 알렉산더 폰 훔볼트재단이 매년 인문사회·자연과학·공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업적을 남긴 학자에게 수여한다. 수상자에게는 총 6만 유로의 상금과 함께 독일에 초청돼 관심 분야를 연구할 기회를 준다.
시골 오지에서 자연과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 김 교수가 어떻게 세계적인 학자로 인정받게 됐는지 그 개인적 성장 과정과 학문적 여정을 들어봤다.
한학자였던 할아버지 영향으로 학문 관심, 서울에서 미국까지의 유학 생활
김 교수는 어린 시절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학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경험했다”는 것. 김 교수의 연구실 한쪽에는 지금도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갓과 손수 필사한 한문옥편이 놓여 있다. 학자의 길로 이끌어준 할아버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드러낸 한 상징이다.
산골 소년이었던 김 교수는 중학교 때 영천 시내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이때 처음 영어를 접했다. ‘F’ 발음과 한글의 ‘ㅍ’ 발음의 차이를 알게 되면서 영어에 관심이 갔다. 영문법의 ‘인칭 개념’도 김 교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왜 한국어와 달리 인칭이 영어 사용에 중요한지 궁금했다.
중학교 졸업 후 대구 영신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김 교수는 82년 경희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중학교 시절, 수학 성적도 좋았던 김 교수는 진로를 놓고 잠시 고민했다. 주변의 권유로 고등학교 때 문과를 택했고, 자연스럽게 영문과를 지원했다. 그런데 이 행복했던 고민이 대학에서 전공을 언어학으로 결정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언어학은 융합학문인 데다 자연과학과 가까운 면이 많다. 청소년 시절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언어의 규칙성이 흥미를 배가하기도 했다. 공부하면 할수록 마치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모험 같아 취업하기보다는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다.
김 교수는 경희대 영문과에서 학·석사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후 학자의 꿈을 품고 1991년 미국의 스탠퍼드대학교(Stanford University)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에 대한 부담감이나 압박감은 없었다. 오히려 “새로움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컸다”. 스탠퍼드대학의 위치도 몰랐던 김 교수지만 대학에서 이룬 성과를 인정받아 경희대 학부 졸업생 중 처음으로 풀브라이트(Fulbright) 장학금과 스탠퍼드 장학금을 받았다. 그 덕에 경제적 어려움 없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건강한 몸이 건강한 사고 만들어, 꾸준한 연구 원동력은 운동
유학 생활을 하면서 미국 대학의 토론문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김 교수는 “한국보다 토론을 통해 깊이 있고 창의적 사고를 유도했다”고 회상했다. 유학 초기에는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공부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단박에 해내기는 어려운 법이다. 김 교수는 “미국 학생들은 정말 자유롭게 토론했다. 그 덕에 연구실적의 깊이나 창의성도 달랐다”고 밝혔다. 치열하게 노력해 토론문화에 익숙해졌고, 전공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도 성과를 보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에는 교수로 임용돼 경희대로 왔다.
김 교수의 지론은 ‘건강한 몸이 건강한 사고를 만든다(Strong Body, Strong Mind)’이다. 지금도 매일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정도 수영을 하고, 철인3종경기에 참가할 정도로 운동을 즐긴다. 올림픽 코스를 2시간 40분에 완주한 기록이 있을 정도다. 김 교수의 연구 습관도 운동과 비슷하다. 연구가 막힐 때는 ”항상 종착지(Finish Line)를 떠올린다”면서,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가진 그릿(grit) 정신이 연구의 원동력이다”라고 강조했다. 어떤 연구가 어렵거나 해결책이 없을 성싶어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반드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침내 김 교수의 연구성과는 세계학계에 널리 알려져 ‘훔볼트 연구상’을 받게 되었다. 홈볼트 연구재단은 매년 독일의 연구자에게 훔볼트 연구상의 후보자를 추천받는다. 추천 사실을 통보받은 후보자가 연구성과를 훔볼트재단에 제출하면 1년 동안 심사한다. 김 교수는 영어와 한국어 언어 현상에 관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를 진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후보로 추천됐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CSLI 출판사, 케임브리지대학(Cambridge University)출판부 등 세계적 출판사에서 영어학 및 한국어학에 관한 저서를 출간했고, 국내에 출간된 여러 저서는 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와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됐다.
일례로 2016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한 <한국어 통사구조: 구조 문법 관점(The Syntactic Structure of Korean: A Construction Grammar Perspective)>은 출간 당시 한국어 주요 통사와 의미 현상에 대한 기술적 타당성을 가진 구조 문법 분석 연구로 한국어 연구의 세계화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5년에는 미국 스탠퍼드대와 공동으로 <영어통사론: 소개서(English Syntax: An Introduction)>를 출간했는데, 이 책은 미국, 유럽,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또 인문학 분야의 세계 최고 수준의 국제학술지색인(A&HCI, 예술 및 인문과학논문색인)에 20여 편의 논문을 게재했고, 국내외 학술지에는 100여 편의 학술논문을 게재해 국내 인문학 연구의 세계화에 크게 기여했다. 김 교수는 풀브라이트 박사학위 장학생, 풀브라이트 소장 학자 연구자,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학 분야 우수연구자에 선정된 바 있다. 이런 업적을 인정해 경희대에서는 지난 2017년 연말 ‘목련상(연구부문)’을 수여하기도 했다. 현재는 미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 폴란드, 일본, 홍콩, 독일 등 여러 국가의 언어학자와 활발한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도 세계적 권위의 상 수상자 낼 수 있다는 자신감 생겨
훔볼트 연구상은 시상식과 함께 2박 3일에 걸쳐 심포지엄을 연다. 2박 3일 동안 수상자는 동료 수상자와 그간의 연구성과를 공유하고 토론한다. 올해 토론의 주요 주제는 ‘기후변화, 생태변화, 지구환경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김 교수는 “기후변화와 같은 전 지구적 문제를 주제로 전공의 벽을 넘어 치열하게 토론하는 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며 “경희가 노력하고 있는 대학의 사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시상식에서 다른 수상자와 의견을 나누다가 ‘작은 변화가 큰 차이점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실천에 나섰다. 지난 4월 19일 서울캠퍼스 스페이스 21에서 개최된 ‘환경인문학 한미 공동 심포지엄’이 그것이다. 김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언어정보연구소가 주관한 이 심포지엄은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 등 우리가 직면한 환경 문제를 주제로 문학, 철학, 언어학, 지리학, 생태학 등 다양한 전공의 한국, 미국 및 영국 연구자가 모여 토론한 자리였다. 경희대에서는 김 교수와 박은정 동서의학대학원 교수, 공우석 지리학과 교수가 참가했고, 미국 미네소타대학(University of Minnesota-Duluth)의 인문학자인 수잔 마허(Susan Maher) 교수, 공학자인 레베카 티슬리(Rebecca Teasley) 교수, 지리학자인 팻 패럴(Pat Farrell) 교수 등이 참석했고, 옥스퍼드대학교 마틴 스쿨(Oxford Martin School)의 마일스 앨런(Myles Allen) 교수는 화상으로 참여했다.
이번 수상은 김 교수에게 자신감을 심어 줬다. “제가 훔볼트 연구상이라는 세계적 권위의 상을 받은 것처럼, 노벨상도 우리나라 연구자가 넘지 못할 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험이 주는 자신감이 있다. 주변의 연구자 중에도 저보다 훌륭한 연구자가 많다”고 강조했다. 이어 “경희대나 국내 연구자가 국제적 네트워크가 없거나, 연구가 국제화되지 않아 후보자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밝혔다.
동료 연구자에 대한 조언도 이어졌다. 김 교수는 “이번 훔볼트 연구자상 시상식의 자연과학 분야에 일본인과 중국인, 싱가포르인은 있었지만, 한국인은 없었다. 그런데 한국 연구자의 실력이 부족해서 생긴 상황이 아니다”라며 “기본적으로 한국의 자연과학 분야가 미국과의 협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생긴 현상이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상은 대부분 유럽 연구자가 추천하는 형태이다. 유럽의 연구자와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노벨상 수상도 어렵지 않다”라고 말했다.
영국의 대학출판부에서 곧 영어 관련 책 펴내
김 교수는 이번 훔볼트 연구자상 수상을 개인의 영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김 교수는 “인문학은 혼자서 하는 학문이라는 생각이 강하지만, 상을 받으며 연구를 지원해주는 분들과 주위에서 함께 토론하고 고민한 선후배 및 동료 학자와 대학원생, 학부생이 생각났다. 무엇보다 언어학자로 첫발을 내딛게 해 준 은사님이신 박병수 교수님과 좋은 연구 환경을 제공해준 경희대학에 감사했다”고 말했다.
기쁨과 함께 책임감도 생겼다. 훔볼트 연구자상을 받은 학자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더 우수한 학문적 성과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부담은 이미 벗어난 듯싶다. 김 교수는 오는 2020년 케임브리지대학출판부에서 새로운 영어 통사론 교재를, 영국의 에든버러대학(Edinburgh University)출판부와는 영어의 주요현상과 관련된 책을 출간하기로 했다. 다른 무엇보다 ‘영어 종주국’으로서 자존심이 강한 영국 대학에서 영어 관련 책을 출판한다는 점에서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글 정민재 ddubi17@khu.ac.kr
사진 이춘한 choons@khu.ac.kr
ⓒ 경희대학교 커뮤니케이션센터 communication@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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