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기고] 사랑할 힘, 살아갈 힘

2018-08-20 연구/산학

2017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다양한 미래를 창조해나갈 졸업생을 대표해 배병훈(언론정보학과 10학번) 학생의 기고를 싣는다. 배병훈 학생은 교시 ‘문화세계의 창조’를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힘’으로 해석했다. 사진은 교시탑.

22일(수) 2017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 개최, 2,336명 졸업
배병훈 졸업생, “사랑을 발아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할 것”

오는 8월 22일(수) 열릴 2017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미래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게 될 2,336명의 졸업생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경희 안에서 거둔 크고 작은 성취가 새로운 도전에 힘이 되고, 경희와 함께 써내려간 삶의 한 페이지가 예상치 못한 좌절을 이겨낼 용기가 되길 바란다. 경희는 졸업생들의 찬란한 추억을 간직하며 대학다운 미래대학을 향한 도전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더 큰 미래를 향한 출발선에서 배병훈(언론정보학과 10학번) 학생이 졸업 소회를 전해왔다. 그 글을 함께 나눈다.<편집자 주>

하숙집의 계약이 종료되던 날은 무척이나 더웠습니다. 지반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태양이 쨍쨍하게 내리쬐고 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가로 돌아가기 전 학교를 한 바퀴 산책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졸업한다고 생각하니 익숙한 풍경마저도 추억이 물든 거리로 보였던 까닭입니다.

무작정 교정의 돌담길을 올라가 교시탑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빙빙 돌기도 하고 괜스레 돌멩이도 한번 차보고…. 문득 발걸음을 힘겹게 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오랜 시일 대학생의 신분으로 살았기에 이별을 두려워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8년 동안이나 대학에 머물렀습니다. 공터에서 건물이 솟아오르고 이름난 밥집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해왔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요. 물론 제 자신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학문적 성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전공 수업에서 배운 약간의 커뮤니케이션 지식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리포트, 시험,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치열한 과업과 사색의 시간이 이어지면서 스무 살 시절보다 조금 성숙해지지 않았나 정리해 봅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그 한 줌의 성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른이 된 뒤 마주한 ‘혐오사회’
대학 입학 전, 저는 문학 소년에 가까웠습니다. 글에서 느껴지는 향취를 즐겼지요. 시인들이 희미한 풍광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부드러운 말씨로 표현할 때면 남몰래 가슴을 부여잡았습니다. 이미 만인이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으리라 예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뒤 마주한 세상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군중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울려퍼지는 혐오적 단어들. 타인의 절멸을 냉정하게 꾀하는 미디어. 특히 2014년은 어린 생명들이 죽어간 사건에도 감히 입에 올리기 어려운 명칭들이 붙여졌던 시기였습니다.

확성기에 대고 말한 듯 크게 울려퍼지는 극단적인 말들 속에서 저는 점차 평정심을 잃어갔습니다. 생명이 품고 있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부정하며 복식과 말투, 계급과 연령으로 타인을 멋대로 판단하려 들었지요.

마침내 거리를 지나다니는 평범한 군중의 얼굴에서도 저열함을 읽어내자 저는 악마가 제 마음을 갉아먹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오래 간직한 저널리스트의 꿈마저 회의가 들었습니다. 이대로라면 활자로 빈자들의 명예를 더럽혀왔던 ‘기레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배병훈 학생이 목도한 한국사회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사라져가는 사회’였다. 그는 자주 거리로 나갔고, 그 경험은 저널리스트라는 꿈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사람에 대한 애정을 회복하다
오염된 말이 혹여나 터져나올까 펜을 들고 떨고 있을 즈음 저는 후마니타스칼리지의 이문재 교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문을 읽는 도중 그분의 글을 접했지요. 아직도 기억나는 몇 구절이 있습니다.

“초여름 뻐꾸기 소리도 어머니 품 같았다 / 귀뚜라미 소리가 머리맡에서 따끔거려도 깊은 잠에 들었다 / 어린 시절, 나는 눈뿐만 아니라 귀로도 살았다 / 오감이 다 살아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를 시어로 바꿔 부르는 문장이었습니다. 남은 사랑의 힘마저 앗아가는 세태에서도 교수님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의 아름다움을 부르짖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 분이 남긴 글귀들을 받아적으며 사람에 대한 애정을 회복했습니다.

돌이켜보면 학내의 교수님들께서는 숨 붙은 존재들의 위대함을 알려주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오랜 역사를 통과하는 동안, 도서관의 낡은 책장에 방치되어버린 텍스트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숨 붙은 존재들의 위대함을 알려주신 교수님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읊으며 범인류적 사랑의 가치를 속삭이고,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을 파헤치며 소수자성을 없애려 드는 파시즘의 추악함을 고발하고…. 그런 배움이 이어지면서 저는 차츰 타인이 내뿜는 고유한 향취에 민감해졌고, 편견을 벗어던졌으며, 희망찬 얼굴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혐오를 향해 격발되는 사유의 탄환’으로 불리는 인문학을 배우며 정신적 건강함을 되찾은 것입니다.

학문은 진실로 삶을 뒤흔들었습니다.

당시 배웠던 텍스트 중 유난히도 기억에 남는 게 있습니다. 미국의 체호프로 불리는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가 1980년 내놓은 <대성당>입니다. 작품은 한 남성이 아내의 친구인 시각장애인을 손님으로 맞으면서 시작합니다. 그는 맹인과 교류해본 적이 없었기에 낯섦과 어색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TV에서 대성당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오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남성은 맹인이 대성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고 말하자 손을 잡고 같이 그립니다. 천천히 기둥을 지나, 누각까지. 마침내 그들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넘어 같은 상(像)을 떠올리곤 외치지요. “이거 정말 끝내준다”.

2015년 서울청소년수련관에서 열린 ‘뿌리 깊은 세계유산, 걸어서 세계 속으로’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여한 배병훈 학생과 참가 청소년들의 모습. 배병훈 학생은 청소년들의 타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그들에게 세계유산의 보존 가치를 알렸다.

‘누군가를 껴안고 싶게 만드는 글’ 쓰고 싶다
무언의 소통으로 이뤄지는 사랑의 완성을 말한 그의 소설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문체는 다르더라도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쿡쿡 찌르는 문장을 적고 싶다고. 척박한 사막과도 같은 현대인의 심장에 청량함을 불어넣어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껴안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다고.

기계적으로 반복해왔던 칼럼 필사를 그만두고 하릴없이 창밖을 쳐다보곤 했던 게 그 즈음이었습니다. 꽃이 떨어지는, 할머니가 부드럽게 머리칼을 쓰다듬는, 커플들이 손을 맞잡는 모습을 관찰하며 마음속에 온화함이 피어나기를, 사랑할 줄 아는 힘이 생겨나기를 바랐습니다.

차분한 관찰이 끝나면 바로 펜을 들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정경을 정확히 그려냈는지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계속 읽어보고 싶은 문장을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면 참으로 기뻤기에 책상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시간을 통해 참된 저널리스트의 모습에 조금은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긍정하고 있습니다. 기레기가 아닌, 타인의 맨얼굴을 보고자 하는 기자.

각자의 자리에서 배움을 실천한 경희인들
물론 교수님에게서 사랑의 중요성을 배운 사람이 저뿐만은 아니었습니다. 한 학우는 동성애자들의 사랑도 사랑이라 불릴 수 있도록 국립국어원에 청원을 넣었습니다. 이성애 중심으로 규정된 단어의 의미를 바꿔달라는 호소였습니다. 그리고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건, 세월호,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사건을 마주한 학우들은 광장에 나가 노란 꽃을 피웠습니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배움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경희 캠퍼스에서 경험한 사계는 배병훈 학생의 핸드폰 사진첩뿐 아니라 마음 깊숙이 자리 잡았다. 늘 말없이 따스하게 품어주는 경희 캠퍼스는 경희인이 지닐 수 있는 또 하나의 뿌리다.

다시 교시탑에 서서 명료한 필체로 적힌 <문화세계의 창조>를 바라봅니다. 그것은 단지 상징물에 적힌 오래된 문자가 아니었습니다. 교수님과 학생들은 미원 조영식 설립자의 유지처럼 만인이 편견의 장벽을 넘어 자유롭게 통하는 ‘문화세계’를 구축해가고 있었습니다.

사용하는 말도 표현하는 방식도 서로 달랐지만 사멸되어가는 사랑의 감정을 발아시키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는 점은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학풍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덕분에 남들을 혐오하며 웃음지을 뻔했던 미래의 신입생들도 차츰 자신이 온화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학습이라는 약간의 고통과 크나큰 희열이 뒤따르는 과정을 통해서.

이제 대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는 학우들은 달라진 환경에 맞춰 사랑을 노래하며 증오와 맞서 싸울 것입니다. 상사가 성평등에 어긋나는 발언을 내뱉으면 철저히 고발하고, 정치인이 빈자들을 멸시하면 비난하고….

종종 무엇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을 때면 추억에 잠겨 이 시절을 회상하고 가르침을 되새길 테지요. 늦깎이 대학생인 저도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담담하게 배운 것들을 실천해 나가려고 합니다. 경쾌하게, 교시탑을 빠져나오려고 합니다.

글·사진제공 배병훈(언론정보학과 10학번)

ⓒ 경희대학교 커뮤니케이션센터
communication@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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