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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운’ 디지털 이미지와 ‘노동의 흔적’

2018-06-11 교육

정혜진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가 자신의 저서 <MEDIA HETEROTOPIAS>의 표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린 스크린이 설치된 영화 촬영 현장을 재현한 표지는 실제와 가상이 공존하는 영화 제작의 일면을 보여준다.

정혜진 교수, 미 듀크대 출판부에서 <MEDIA HETEROTOPIAS> 펴내
디지털 시대, 다국적 영화 산업이 영상과 스토리텔링에 미친 영향 다뤄
기존 견해와 차별화된 영화 산업 이론 제시, 학계 반응 뜨겁다

영화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이 지난 6월 6일 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베일을 벗었다. 개봉 하루 만에 누적 관객 수 100만을 돌파할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요인 중 하나는 생생하고 압도적인 비주얼. 제작진은 공룡들의 눈 깜빡임, 호흡, 미세한 떨림까지도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구현해냈다.

컴퓨터 특수효과(Computer Generated Imagery, CGI)는 스펙터클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관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정혜진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이 ‘매끄러운’ 디지털 미학에 질문을 던졌다. 완벽해 보이는 이미지가 감추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디지털 기술 도입으로 변화된 영화 제작 방식이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지점은 없을까?

디지털 이미지, 그 속에 숨은 제작 환경을 들여다보다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했다. 정혜진 교수가 올해 2월 미국 듀크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MEDIA HETEROTOPIAS(이하 미디어 헤테로토피아)>이다. 디지털 시대, 다국적 영화 산업이 영상 미학과 스토리텔링 방식에 미친 영향을 다뤘다. 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디지털 매체에 노출된 우리에게 보다 윤리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심층 관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영화 관련 서적은 보통 영화 이론과 제작을 분리해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미디어 헤테로토피아>는 그 둘을, 특히 디지털 기술 연구를 병행한 점이 눈에 띈다. 정혜진 교수는 “영화계에서도 이론 및 제작의 융합연구에 관심을 가지는 추세”라며 “현장 조사와 분석, 전문가 인터뷰 등을 진행하고 이를 영화 분석과 통합했다”고 말했다.

디지털 기술은 영화 산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디지털 카메라, CGI 등 기술이 발전하며, 영화 제작진과 촬영 장소가 전 세계로 분산됐다. 관객들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상 이미지로 볼 수 있는 ‘마법’을 경험하게 됐다. 완벽한 디지털 영상은 컴퓨터로 손쉽게, 자동으로 만들어질 것이란 인식도 생겨났다. 전 세계에 분산돼 있는 수많은 영화 제작 단계와 그 물질적 배경이 은막의 스펙터클 뒤에 가려진 것이다.

정 교수가 디지털 기술, 특히 컴퓨터 시각효과에 관심을 가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 교수는 “영화 제작 과정에 다양한 국적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는데, 이들은 봉합 없이 매끄러운 이미지를 만드는 게 목표인 디지털 미학에 가려지거나 지워지는 경우가 많다”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가상공간과 특수 효과에 다양한 노동의 형태와 제작 단계의 흔적이 남는다”고 설명했다.

영화 <괴물>, <빅 히어로 6> 등에 나타난 ‘미디어 헤테로토피아’

정혜진 교수는 그 예로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을 들었다. CGI가 굉장히 자연스러웠다고 호평 받은 ‘괴물’을 탄생시키기 위해 한국의 게임 디자이너, 캘리포니아의 시각효과 스튜디오, 뉴질랜드의 아티스트 등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협업했다. 익숙한 배경, 서울에 갑자기 출몰한 낯선 ‘괴물’이야말로 다국적 협력으로 만들어진 매우 가시적인 ‘이음새’라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빅 히어로 6>(2014)의 배경인 ‘샌프란소쿄(San Fransokyo)’도 비슷한 예이다. 샌프란시스코와 도쿄의 실제 모습이 합성된 샌프란소쿄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가상 공간이다. 이렇게 여러 층위로 이루어진 이미지가 바로 정교수가 명명한 ‘미디어 헤테로토피아’이다.

이는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확장시킨 개념인데, 헤테로토피아는 ‘다른, 다양한’을 의미하는 ‘hetero-’와 ‘장소, 공간’을 의미하는 ‘-topia’를 합성한 용어이다. 유토피아와 달리 실존하는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는 기존 공간을 재현하면서도 현실에서 일탈하거나 의미를 전도시키는, 실제와 환상이 중첩되고 집약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국가적이면서 초국가적인 대안 제시
그렇다면 ‘미디어 헤테로토피아’는 무엇일까. 정혜진 교수에 따르면 여러 제작 공간에서 각각 만들어진 디지털 영상과 실사 영상이 디지털 합성 과정을 거쳐 중첩된 이미지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 개념을 활용하면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된 전 지구적 영화 제작망과 문화적 교류의 잔재가 혼성된 공간의 영상 미학을 분석할 수 있다.

정 교수는 “디지털 미학을 형성하는 영화제작 과정을 자동화로 잘못 인식할 때 미디어 제작에 필요한 노동의 여러 단계를 평가 절하할 위험이 있다”라며 “이 때문에 디지털 특수효과 스튜디오와 전문가들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무리한 마감 일정으로 신체 및 정신적으로 고통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음새 없는’ 디지털 영상이 만들어지는 영화 제작망이 점점 전 지구적으로 분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제작 환경과 문화적 배경을 무시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정 교수는 “이는 지나치게 많은 경제 자본과 문화 자본이 몇몇 이름 있는 할리우드 감독이나 제작자, 스튜디오에 돌아가는 불균형한 산업구조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경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가공된 매끄러운 외관 아래 있는 다양한 노동 작업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식 방법 개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미디어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은 손쉽게 국경을 초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피하면서 동시에 국가라는 범주의 제약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라며 “국가적이면서 초국가적일 수 있고, 지역적이면서 세계적일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고 밝혔다.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접점 연구할 계획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정혜진 교수는 “디지털 기술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문화적 배경과 어떤 제작 환경에서 만들어졌는지 관심을 갖고 영화를 보면 심층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기대를 밝혔다.

다양한 디지털 매체에 노출된 우리는 가상과 실제가 접합된 이미지가 매우 익숙하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이것이 사람과 관련 있을 때는 좀 더 윤리적인 시각이 필요하고, 이미지 해독능력이 강해진 만큼 표면적으로 보는 것뿐 아니라 심층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시각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혜진 교수는 컨퍼런스에서 상을 받으며 듀크대학교 출판부와 연을 맺게 됐다. <Production Culture>의 저자 존 칼드웰(John T. Caldwell)은 정 교수의 책에 대해 “영화 산업에 대한 기존 견해와는 다른 이론과 문화를 생산해내는 연구서”라고 평하는 등 학계의 관심도 뜨겁다.

정혜진 교수는 아직 하고 싶은 연구가 많다. 모두 디지털 기술과 영상매체의 미학에 관한 연구다. 특히 포스트휴먼 담론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이와 관련해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SF적 상상력과 포스트휴먼 신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가치, 생명과 죽음의 의미변화를 재고하기 위해서다.

정 교수는 “사회제도나 윤리의식의 변화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며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다양한 접점을 연구하고 싶다”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

 
<정혜진 교수 프로필>

경희대학교 외국어대학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영화이론, 영상미학, 디지털 기술, 글로벌 시네마, 다큐멘터리 영화를 주로 연구해왔다. 서울대학교에서 불어교육학을 전공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엔젤레스에서 영화학 석사학위를,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 바바라에서 영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The Re-Animation of the Digital (Un)Dead, or How to Regenerate Bodies in Digital Cinema”(Visual Studies 30:1, 2015), “Media Heterotopia and Transnational Filmmaking: Mapping Real and Virtual Worlds”(Cinema Journal 51:4, 2012) 등이 있다. 최근 미국 듀크대학교 출판부에서 <MEDIA HETEROTOPIA>를 펴내며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박은지(커뮤니케이션센터, sloweunz@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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