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유토피아 상상’을 통해 현실을 다시 보다

2018-01-16 교육

외국어대학 문학전공 교수로 구성된 ‘세계문학 독회모임’에서 <유토피아의 귀환: 폐허의 시대, 희망의 흔적을 찾아서>를 발간했다.(사진 왼쪽부터 황수현, 이명호, 김경석 교수)

외국어대학 문학전공 교수들로 구성된 ‘세계문학 독회모임’
<유토피아의 귀환: 폐허의 시대, 희망의 흔적을 찾아서> 발간
“현실 바깥에서 현실을 비판하고 교란하는 유토피아 상상 복구해야”


경희대 외국어대학 문학전공 교수들은 매달 넷째 주 목요일 ‘해방’을 맞는다. 논문을 위한 독서가 아닌 ‘독서를 위한 독서’를 만끽하기 때문이다. 논문 생산의 압박에서 벗어나 문학작품 읽기의 기쁨을 누리는 이 날은 ‘세계문학 독회모임’(이하 ‘독회모임’)이 열리는 날이다.

독회모임은 다양한 언어권의 문학을 읽고 토론하는 ‘학문놀이공동체’다. “노동 아닌 책 읽기, 마감 없는 토론, 주제넘은 수다”가 모임의 모토다. 아무 조건 없이 책을 읽고 아무 제한 없이 토론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묻고 또 묻는다.

독회모임 교수들이 ‘일탈’을 감행해 잠시 ‘본업’으로 돌아왔다. 유토피아를 주제로 세계문학의 계보를 다시 그려보자는 아이디어가 관련 작품을 소개하는 논문 생산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를 모아 <유토피아의 귀환: 폐허의 시대, 희망의 흔적을 찾아서>(경희대학교 출판문화원)를 펴냈다. 저자들에겐 보람 있는 일탈이고, 독자들에겐 고맙기만 한 일탈이다.

붕괴의 시대, 흩어져 있는 미래에 대한 꿈을 복구하다
신자유주의의 위력이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소비적 쾌락에 사로잡힌 현대인은 또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비웃는다. 기후변화, 경제적 불평등, 공동체 파괴, 폭력과 테러 등으로 인해 미래는커녕 현재조차 그 지속성을 장담하기 어렵다. 유토피아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고, 공상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독일의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이 지적했듯 유토피아의 포기는 역사 창조 의지는 물론 역사 이해 능력의 상실로 귀결된다. 독회모임 교수들의 문제의식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게 쉽지 않은 시대, 현실 바깥에서 현실을 비판하고 교란하는 유토피아 상상의 복구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명호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유토피아가 근대 계몽시대 또는 사회주의 계몽시대에 나왔던 미래지향적 문제의식이라면 지금은 그것이 붕괴되는 시대”라며 “우리는 시대를 역류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붕괴의 시대지만 그 속에 잠재돼 있는, 흩어진 채로 존재하고 있는 미래에 대한 꿈을 다시 한 번 복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김경석 중국어학과 교수도 설명을 덧붙였다. 김 교수는 “한 개인이 장년이 돼가는 과정에서 어린 시절 꿈꾸었던 삶을 반추해보는 것처럼 이 책은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바쁘게 달려가고 있는가’를 되묻는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6개 주제로 유토피아문학 25편 다뤄
<유토피아의 귀환>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부터 박민규의 <핑퐁>까지 동서고금의 유토피아문학 25편을 다룬다. 사유재산과 계급 불평등, 과학과 기술 문명, 무위와 자연, 감시와 자유, 몸과 욕망, 폭력과 공존 등 여섯 개 주제로 유토피아문학을 분류, 작품에 대한 심도 깊은 비평은 물론 줄거리와 작가 소개도 친절하게 담았다.

유토피아 담론에서 문학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유토피아의 추구는 인간존재에 대한 성찰에 기초하는데, 문학은 소외와 분열을 넘어 존재의 본향을 좇는 인간의 근원적 소망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정의내린 유토피아문학은 단지 ‘멋진 신세계’를 구체적으로 그린 작품에 한정돼있지 않다. 유토피아문학은 유토피아로의 지향을 포함한 작품, 즉 유토피아를 하나의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도달해야 할 하나의 가치로 확장시킨 문학이다.

이명호 교수는 “유토피아문학을 구성하는 두 가지는 현실 모순에 대한 비판, 그것을 넘어서는 대안세계에 대한 지향성”이라고 강조했다. 여섯 개의 주제 또한 현재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순의 양태를 구획해본 것이라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지금 여기 없는 좋은 곳’을 욕망해야
유토피아문학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저마다 꾸는 꿈이 다르고 꿈을 전하는 방법도 다르고 서양과 동양이 다르다. 그러나 저자들에 따르면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이들 모두 ‘지금 여기 없는 좋은 곳’ 유토피아를 욕망한다는 것이다.

2018년 현재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헬조선과 수저계급론, 77만원 세대를 언급하는 절망의 시대에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것이 희망고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희망을 놓쳐버렸을 때는 극복의 의지마저 놓치게 되고, 결국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게 저자들의 생각이다.

이명호 교수는 “우리가 촛불을 경험하면서 주체 재탄생이 일어났고, 변화와 연동된 희망의 정서와 이를 추동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은 놓칠 수 없다”라며 “이는 궁극적으로 유토피아와 맞닿아있고, 판타지나 희망고문이 아닌 형태로 유토피아를 말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책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문학의 현재’도 계속 따라잡을 것
<유토피아의 귀환> 발간에 대해 이명호 교수는 “한 단과대학에 있는 교수들이 협업을 통해 결과물을 내 기쁘고, 경희대학교 출판문화원에서 책을 펴냄으로써 지속가능한 시리즈물로 기획할 수 있게 된 것이 큰 성취라고 생각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독회모임 결성계기가 궁금했다. 이 교수는 “우리도 한때는 문학청년이었는데 그 열정이 전공연구에만 구획되다 보니 아쉬움이 있어, 작품 자체를 읽으며 교수들끼리 친해지는 데 초점을 맞췄다”라며 “아무 성과나 매개 없이도 함께 책을 읽고 식사하고 수다를 떠는 행위가 갖는 힘이 필요한 시절이고, 이를 그리워했다”고 말했다.

독회모임은 매년 언어권별로 일 년 동안 읽을 책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황수현 스페인어학과 교수는 “그 해의 쟁점과 관련된 세계문학뿐 아니라 한국문학의 현재를 따라잡는 것도 중요한 화두 중 하나”라고 설명하며 “독회모임은 타문화권의 의미 있는 작품을 서로 나눌 수 있는 토론의 장이자 문학담론을 스스로 만들고 조망해보는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김경석 교수는 “가장 가까운 곳에 가장 좋은 지적 자원을 두고 우리가 그것을 못 느끼거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독회모임을 통해 문학이 가진 보편성과 특수성, 다양한 문화권의 같음과 다름에 대한 것을 느껴볼 수 있다”고 독회모임의 가치에 대해 설명했다.

<유토피아의 귀환>은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세계문학 연구총서의 제1권이다. 세계문학 독회모임은 인간, 삶, 세계를 트랜스내셔널한 관점에서 성찰하는 기획물을 계속 출간할 계획이다.

박은지(커뮤니케이션센터, sloweunz@khu.ac.kr)
신승윤(커뮤니케이션센터, ballpin@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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