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경희대에서 제대로 날아보겠다”
2017-12-12 교육
‘세계 상위 1% 연구자(HCR)’ 박은정 박사 동서의학대학원 교수 임용
나노독성학·면역독성학 분야 세계 최고 연구 실적, HCR 2년 연속 선정
“이제는 ‘미래’ 생겨, 비웃을지 모르지만 노벨상에 도전하겠다”
‘세계 상위 1% 논문 쓴 경단녀(경력단절 여성)’ 박은정 동서의학대학원 교수에 대한 세간의 표현이다. 마지막 계약 기간 만료 이후에는 연구를 그만두고 은퇴를 고민했던 그녀가 경희대학교 동서의학대학원 교수로 임용됐다. “매일이 나는 기분”이라는 박은정 교수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와 앞으로의 포부를 들어봤다.
Highly Cited Researcher(HCR)은 논문 피인용 횟수가 ‘세계 상위 1%에 해당하는 연구자’를 말하며 세계 학술정보 서비스기업인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Claricate Analytics, 옛 톰슨로이터)에서 매년 발표하고 있다. 경희대에서는 올해 약학과 정서영 교수(약리학&독성학 분야, 11월 30일자 정서영 교수, ‘세계 상위 1% 연구자 영예’ 포커스 기사 참조), 식품영양학과 임종환 교수(농업과학 분야, 11월 23일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자 2년 연속 선정’ 포커스 기사 참조)와 박은정 교수가 선정됐다.
가족 때문에 포기했던 연구 뒤늦게 시작
“하고 싶은 연구를 계속하고 성과도 좋았지만, 미래가 없었다”는 박은정 교수는 ‘연구교수’였다. 2016년에 이어 두 번째 HCR 선정이었지만, 시상식 참석이 부끄러워 남편에게 참석 여부를 물었다. 남편은 “나중에 이야깃거리라도 만들게 다녀오라”며 격려했다. 시상식 이후 2주가 지났고, 박은정 교수는 경희대 동서의학대학원의 교수가 됐다.
‘경단녀’는 박은정 교수를 표현하는 대표적 수식어다. 박 교수는 1986년 동덕여대 건강관리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의대를 가고 싶었지만 보다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4학년 때는 한국전력에 별정직 직원이 됐다. 하지만 임신과 함께 1년을 못 채우고 퇴사했다. 육아를 위해서 대학원에 가고 싶은 마음도 접어야 했다.
이후 1993년 박은정 교수는 모교의 약학대학원에 입학했다. 2년 후에는 친정어머니의 췌장암 등을 이유로 학교를 쉬었다. 1개월 뒤에는 시아버지의 식도암 말기 판정도 있었다. 꿈보다는 가족들의 병간호가 먼저인 시기였다.
박은정 교수는 석사 졸업 후 8년이 지난 2003년에야 박사과정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연구에 매달렸다. 박 교수는 이때의 결정을 “내 연구를 위해서 남편과 가족에게 희생을 요구했던 순간”으로 표현하며 힘든 순간중 하나로 뽑았다.
박은정 교수에게 연구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을 물었다. 박 교수는 전율을 느낀 순간이 두 번 있었다며 “대학원 입학 후 미국면역학회 포스터 발표장에 들어간 순간과 세륨나노파티클을 처음 현미경으로 관찰하던 순간”을 꼽았다. 두 번의 전율이 박 교수를 연구자의 길로 이끌었다.
박은정 교수에게 가족들의 연속적인 발병은 큰 숙제였다. 나노독성학 연구를 시작한 계기이기도 하다. 늦은 시작이었기 때문에 박 교수는 6개월 동안 생화학실습책을 완독하고, 학부 강의부터 다시 기초를 쌓았다. 이 기간 동안 본인이 하고 싶은 연구에 대해서 더 고민할 수 있었고 ‘나노독성학’을 연구해 박사과정을 3년 만에 마쳤다.
이미 마흔이 넘은 시기였다. 불러주는 곳은 없었지만 박은정 교수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박사 졸업 3년 뒤였던 2011년 ‘한국연구재단 대통령 포스닥 펠로우십’에 지원했다. 박사 취득 7년 미만 비정규직 연구자 중 뛰어난 연구자를 선정하는 프로그램이다.
펠로우에 선정돼 5년간 매년 1억 5,000만원씩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이를 통해 아주대 의대 연구교수가 됐다. 비록 연구교수 신분이었지만 꾸준히 연구한 결과 뛰어난 성과를 얻었다. 박 교수의 논문들은 편당 400~500회 이상의 피인용 횟수를 보인다.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2016년부터 2년 연속 HCR에 선정됐다.
HCR 실제로는 2년 아니라 4년 연속 선정
박은정 교수에게 최근의 변화와 그 소감에 대해 물었다. 박 교수는 “연구하는 것은 다른 게 없다. 하지만 이전과 비교해서 미래가 생겼다는 점이 다르다”라고 말했다. 이어 “마지막 계약 기간이 끝나면 은퇴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원하는 연구를 계속 할 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고 밝혔다.
채용 이후 경희대를 처음 방문했다는 박은정 교수는 “사람들이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나는 오히려 조건이 좋은 상태에서 연구를 해본 적이 없다. 좋은 조건, 좋은 건물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낀다며 “내가 여기 잠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계속 연구를 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며 “내가 목표하고 가고자하는 곳으로 멀리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좋다”고 말했다.
박은정 교수의 HCR 선정은 2년으로 알려진 바와 다르게 4년 연속이다. 하지만 선행한 2년간은 이메일 연동 문제로 통보를 확인하지 못했다. 일반적인 연구실과는 다르게 박 교수의 일정을 확인할 조교가 없어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박 교수는 “이것도 비정규 연구 교수의 단점이라면 단점일 것”이라며 웃음을 보였다.
박은정 교수에게 HCR 2년 연속 선정의 의미와 원동력에 대해 물었다. 박 교수는 “연구 분야에 대해서 빠르게 반응한 것이 원동력”이라고 밝혔다. ‘나노독성학’은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분야로 나노 물질에 들어있는 독성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박 교수는 “공학분야에서는 하루에도 새로운 물질들이 계속 개발되는데, 이에 대한 안전성 확인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며 연구의 이유를 밝혔다.
이어 “미국에서 은나노 세탁기가 유해 논쟁이 벌어지면서 나노독성학에 대해서 더욱 관심이 고조됐다”며 “당시 안전성 검증이 되지 않은 물건들에 대한 관심으로 연구에 집중했고, 기준이 되는 물질들을 위주로 연구해 논문을 발표했다”고 밝혔다. 박은정 교수의 이런 연구들은 선행연구로 많은 연구들의 기반이 됐다.
혼자 아니라는 느낌 들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 얻어
지금까지 가장 힘든 순간을 묻는 질문에 지칠 것 같은 순간마다 ‘기죽지 말자, 포기하지 말자’는 생각을 한다는 박은정 교수는 “이제야 연구를 계속 할 수 있게 도와준 가족에게 빚을 조금 갚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어 “가족들이 시아버지의 병간호를 해야 하는 순간에도 내 연구를 포기하지 못하고 고집해야 하는 순간이 힘들었다”고 밝혔다.
이어 “남들은 고집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하겠지만, 비정규직으로 떠돌며 연구를 계속하면서도 오히려 그만 둘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며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연구를 하는데, 내가 알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연구를 하지 않으면 그럴 의미와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정 교수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물었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 즐기던 연구를 계속 즐겨보고 싶다”며 “남들이 듣고는 비웃겠지만 ‘노벨상’을 받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어 “이제는 연구 과제도 쓸 수 있고, 먼저 연구를 하자는 분들도 많아졌다”며 “앞으로는 제대로 날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며 “주변에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고 계셔서, 앞을 향해 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바쁜 연구 일정 탓에 2008년 이후에는 어머니 산소에도 가지 못했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한 박은정 교수는 “어머니께 다음에는 꿈을 이뤄 다시 오겠다고 말씀드렸다. 경희대는 내가 한걸음 나아갈 수 있게 도와줬다”고 말했다.
이어 “나도 모르게 갖고 있던 설움을 씻어주셔서 감사하고, 반갑게 맞아 주셔서 더욱 감사하다”며 “아직 많이 부족하고 주변 교수님들의 능력에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경희 구성원으로서 그 눈높이에 맞는 교수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박은정 교수는 경희대가 추진하고 있는 5대 연계협력클러스터 중 바이오헬스 클러스터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바이오헬스 클러스터는 한의학, 의·생명 관련 분야를 연계·발전시켜 국민 건강과 삶의 질 제고에 기여하는 글로벌 수준의 연구 성과 창출을 목표로 지난 2016년 출범했다. 학내 연구 역량을 결집하고 관·산·학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강철훈 동서의학대학원장은 박 교수 영입에 큰 기대감을 전했다. 강 원장은 “박 교수의 연구가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연구인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며 “여러 분야에서 학문을 융합해 연구하는 연구자를 찾고 있었는데, 박 교수의 그간 연구 성과가 그에 적합한 연구자라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정민재(커뮤니케이션센터, ddubi17@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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