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석학 초청 특강 '21세기에 다시 보는 해방후사 ②'
2011-11-18 교육
“중국 내전이 한국 분단에 종지부 찍었다”
이정식 명예교수, 한반도 분단 원인 새 학설 발표
펜실베이니아대학 이정식 명예교수의 ‘2011 석학 초청 특강’ 두 번째 강의가 지난 11월 16일 서울캠퍼스 청운관 B117호 강의실에서 2시간 30분 동안 열렸다. ‘중국의 내전은 한국 분단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제목의 이날 강연은 80세의 노학자가 최근에 얻은 결론을 처음 발표하는 자리였다. 첫날의 분위기와 달리 강연이 끝난 뒤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특히 외부 청중의 질문 요청이 이어져 경희대학교의 ‘2011 석학 초청 특강’에 대한 사회의 높은 관심을 보여줬다.
이정식 명예교수는 “중국의 내전이 한반도 분단에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는 주장이 다소 이상하게 들릴 것”이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한국 현대사를 50년 동안 연구해온 자신도 이번 특강을 준비하면서 뒤늦게 깨달았다”면서 1946년부터 1948년 사이에 만주에서 전개됐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팔로군)의 내전이 한반도 분단에 끼친 영향을 역사적 근거와 개인적 체험을 통해 설명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는 한반도의 국제적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이에 대한 국내 여론은 분노로 들끓었으며, 좌익과 우익 모두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는 입장이었다. 8·15 해방으로 독립을 기대했는데 신탁통치로 독립이 지연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46년 1월 3일 조선공산당은 서울운동장에서 신탁통치 반대 궐기대회를 갖기로 했다가 갑자기 신탁통치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다. 이정식 명예교수는 “이는 스탈린의 지시에 의한 것이며, 조선공산당이 자주성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이후 한국의 정세는 대규모 파업 등 충돌과 대립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지만 이 같은 내적 요인이 한반도 분단을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는 것이 이정식 명예교수의 주장이다.
당시 만주에서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만주지역의 이권에 관심이 있던 스탈린은 중공군의 승산이 없다고 판단, 1945년 8월 20일 중국공산당에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와의 투쟁을 중단하고 협조해 연립정부에 참여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그러나 그해 9월에 열린 런던회의에서 일본 통치 참여와 트리폴리 지역 할양 요구가 미국과 영국에 의해 거부되자 정책을 180도 수정, 10월 8일 중공군에게 30만 병력을 투입해 투쟁을 재개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만주에서의 중국 내전은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었다”고 이정식 명예교수는 말했다. 소련은 일본군(관동군)에게 접수한 무기 등 군수물자를 중공군에게 제공했으며, 미국은 국민당 군대를 훈련시키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만주 내전 초기에는 주더(朱德)가 이끄는 중공군(팔로군)이 우위를 점하는 듯했지만 미군의 지원을 받은 1946년 5월 국민당의 신1군과 신6군이 만주지역으로 진입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이에 스탈린은 패퇴하고 있던 중공군을 위해 북한지역을 후방기지로 제공했다. 국민당 군대는 소련이 점령하고 있던 국경을 넘어올 수 없었으며, 중공군은 북한지역에서 휴식을 취하고 소련군의 군사훈련을 받으며 반격의 기회를 노릴 수 있게 됐다. 당시 북한지역을 통해 중공군에게 보급된 군수물자는 1946년 2만 톤, 1947년 21만 톤, 1968년 50만 톤에 이르렀다. 이정식 명예교수는 “스탈린은 당시 북한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고, 따라서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면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국제적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였지만 실제로 원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영국·소련·중국이 한반도를 신탁통치할 경우 한반도에 대한 지분이 4분의 1로 줄어들기 때문에 북한지역을 전부 장악하기를 바랐다는 분석이다. 그 근거로 이정식 명예교수는 1945년 9월 20일에 이미 ‘소련 점령지(북한지역)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문을 발송한 사실을 들었다.
이정식 명예교수는 1946년 6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 가능성을 말한 ‘정읍 선언’을 분단 고착화의 계기라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지만 이는 당시의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일본 점령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던 반면, 소련은 중공군이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북한지역을 분할 통치하는 전략을 채택해 분단 고착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강의가 끝난 뒤 “만일 한국의 지도자들이 의견 일치를 보았으면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았느냐”는 학생의 질문에 이정식 명예교수는 “남북한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8년 4월 백범 김구와 김규식 선생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김두봉 등을 만났지만 당시 김일성은 ‘나는 실권이 없다’고 실토했다”고 말하며 “남과 북 모두 실권(주권)이 없는 상태에서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정식 명예교수는 이번 강연을 통해 한반도 근대사는 세계사와 함께 국제적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2011 세계 석학 초청 특강’의 세 번째 강좌는 오는 11월 23일(수) 오후 3시 ‘6.25전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을 제목으로 서울캠퍼스 오비스홀 111호 강의실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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