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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2022-04-28조회수 1217
작성자
디에고 데 란다 지음 | 송영복 옮기고 엮음



마야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고대 마야문명 이해의 결정판
전 세계에 번역·출간, 국내에서는 최초


디에고 데 란다 지음 | 송영복 옮기고 엮음 | 176*223 | 448쪽 | 무선 | 22,000원
2022년 4월 28일 | ISBN 978-89-8222-719-6 (93940)






송영복 교수가 20년에 걸쳐 번역하고 해설을 붙인 총 3,500매에 이르는 방대한 작업
마야인의 정치, 사회, 성과 사랑, 인신공양 풍습, 건축, 문자, 음식, 의복, 환경 등
16세기 에스빠냐 신부가 지켜본 마야인의 열두 달


이 책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이유는 희소성이다. 아즈텍이라고 불리는 메시까와 남아메리카의 잉까문명에는 상대적으로 더욱 많은 사료와 기록들이 남아 있다. 반면에 마야를 연구하기 위한 식민지 초기의 종합적인 1차 사료는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마야문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책을 가장 먼저 찾게 된다. - 본문에서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Relaci?n de las cosas de Yucat?n)》은 '마야문명' 하면 항상 따라붙는 가장 유명한 사료이다.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고 난 직후인 16세기, 가톨릭교회의 신부인 디에고 데 란다(Fray Diego de Landa)는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 마야 원주민들에게 선교 사업을 펼쳤다. 그리고 마야문명 정복의 역사부터 주변의 지리, 마야인들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성과 사랑, 인신공양 풍습, 건축, 문자, 음식, 의복, 환경 등 모든 것을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은 유럽 열강이 초기 식민지를 개척하던 시대에 남겨진 마야문명에 관한 최초이자 유일한 종합 사료이며 마야인들의 삶에 관한 종합적인 보고서로, 한마디로 말하면 마야문명 종합 백과사전이다.

굳이 우리나라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이 책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합쳐 놓은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미 유럽 열강의 침략과 식민지화로 사라진 고대 마야 원주민들의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 가치를 찾는 교양의 의미에서, 마야문명에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면 필수적인 사료라는 점에서 이 책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이 책에는 마야인들이 남긴 문자의 발음기호 일부가 수록되었는데, 나머지 마야문자를 해독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하였다.

여러 판본을 비교한 주석과 역사·지리 등의 해설을 덧붙인
총 3,500매에 이르는 방대한 작업

최초로 간행된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은 (현재에는 유실된) 란다 원본의 필사본이 발견되어, 이를 1864년 브라쉐르가 번역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은 이미 19세기부터 영어, 프랑스어, 독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등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하였고, 마야 지역을 여행하는 관광객에서부터 학자와 문인에 이르기까지 실로 수많은 사람에게 역사 자료 혹은 문학작품으로 폭넓게 읽혀 왔다.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등의 유럽어 번역본은 이미 100여 년 전에 출간되었고 일본어판도 1982년에 출간되었다.

경희대학교 송영복교수는 멕시코 유학 시절인 1995년부터 스페인어로 된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원전을 번역해 꼬박 20년 후인 2014년 탈고하였다. 사실 원전인 본문의 양은 많지 않고, 마치 오래된 이야기책처럼 쉽게 읽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낯선 마야 원주민의 역사, 문화, 종교의 인신공양 풍습 등을 접할 때면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에서 오지 원주민들의 완전히 새로운 생활과 문화를 접하는 듯한 신기함과 기이함도 동시에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 출간되는 한국판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에는 이러한 본문 내용뿐 아니라 번역자가 쓴 관련 배경지식이나 가리바이본, 토설본, 레온본 등 다른 판본과 비교한 상세한 각주와 해설이 덧붙어 있다. 무려 3,500매에 걸친 방대한 작업이다. 표지에 QR코드를 넣어서 무료로 배포하고 있는 원서까지 포함하면 5,000매가 넘는다. 마야문명이라는 역사 속의 다른 지역과 문화에 대해서 자세하게 쓴 500여 년 전의 이야기이다 보니 등장하는 이름, 지명, 용어, 역사적 사실 등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자들을 위해 쓴 이러한 해설과 주석은 본문의 내용과 구분되어 원한다면 필요한 부분만 읽을 수 있도록 편집되어 있다.

전 세계에 번역·출간된 책이지만, 중남미문화에 대한 벽에 부딪혀
우리나라에서는 8년 동안 출판사 찾지 못해 …

송영복 교수는 어렵게 번역을 마치고도 출간할 출판사를 몇 년 동안 찾지 못하자 온라인 매체인 〈오마이뉴스〉에 이 책의 출간 필요성을 절절하게 토로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중요한 책이 분명한데도, 대중성을 최우선 하는 최근 출판 시장에서 번번이 출간이 막히자 쓴 글이다. ‘당장 팔리지 않더라도 이러한 책은 꼭 출간되어야 한다’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이 언젠가 한 번은 들춰 볼 필요가 있고, 장기적으로 타문화 이해에 깊이를 더할 책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그는 “얄팍한 정보마저도 마야문명의 경우는 오류와 왜곡이 넘쳐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대표적 고대 문명 중의 하나인 마야문명에 대하여 좀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는 사료가 한국말로 번역되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내 작은 바람”이라고 쓰고 있다.


차례

머리말
주요 연표
이런저런 일러두기
약어 목록

1. 유까딴에 대한 묘사 - 다양한 계절에 대하여
2. 지역 이름의 유래와 이곳의 사정
3. 헤로니모 데 아길라르의 포로 생활 - 에르난데스 데 꼬르도바와 그리할바의 유까딴 탐험
4. 꼬르떼스의 꾸스밀 탐험 - 아길라르와 그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
5. 유까딴 - 중요한 옛 건축물들
6. 꾸꿀깐 - 마야빤의 건립
7. 유까딴의 정부, 제사장, 과학, 문자와 책
7. 뚜뚤시우족 사람들의 도착과 이들이 마야빤 촌장들과 맺은 동맹 - 꼬꼼의 폭정과 몰락 그리고 마야빤의 쇠퇴
9. 마야빤의 연대기적 기념물 - 소뚜따 왕조의 건립 - 첼족의 기원 - 유까딴의 3대 주요 왕조
10. 정복 이전 유까딴에서 발생한 많은 재난: 태풍, 역병, 전쟁 등
11. 에스빠냐 사람들의 도착에 대한 예언들 - 유까딴 최초의 총독인 프란씨스꼬 데 몬떼호의 전기
12. 몬떼호가 유까딴을 항해하고 정복하다 - 첼족 사람들이 치첸이트사를 내주다 - 인디오는 자신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을 요구하다
13. 몬떼호가 사람들과 함께 유까딴을 떠나 멕시코로 향하다 - 그 후 아들 프란씨스꼬 데 몬떼호가 이 땅을 평정하다
14. 에스빠냐 사람들이 떠나고 난 후 유까딴의 상황 - 총독의 아들 돈 프란씨스꼬가 유까딴에 에스빠냐 정부를 다시 세우다
15. 원주민들에 대한 에스빠냐 사람들의 잔인함 - 그들은 (그 잔인함을) 어떻게 변명하였는가
16. 정복 이전 나라의 상태 - 반란 - 인디오들을 위한 왕의 칙령 - 총독의 죽음 - 그의 후손들
17. 에스빠냐 프란씨스꼬파 신부들의 유까딴 도착 - 인디오 보호조치의 실시 - 엔꼬멘데로(대농장주)들과의 분쟁
18. 인디오의 나쁜 습관들 - 신부들이 이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다 - 원주민들에 대한 교육 - 배교자들에 대한 벌
19. 또랄 오비스뽀(주교)의 도착 - 감옥의 인디오들을 독단적으로 석방시키다 - 프란씨스꼬 수도회 신부들의 활동을 정당화하려는 란다의 에스빠냐 방문
20. 유까딴의 집 짓는 방법 - 촌장들에 대한 인디오의 복종과 존경 - 머리를 꾸미고 옷을 입는 방식
21. 유까딴 인디오의 음식과 음료
22. 인디오의 그림과 문신 - 술에 취하기, 연회, 광대놀이, 음악과 춤
23. 산업, 교역, 화폐 - 농업과 종자 - 법률과 친절함
24. 유까딴 사람들의 수를 세는 방법 - 족보 - 고아들의 상속과 후견 - 촌장의 승계
25. 결혼 - 유까딴 사람들의 잦은 이혼 - 결혼식
26. 유까딴의 세례 방식 - 그것을 어떻게 거행하는가
27. 유까딴 사람들의 고해성사 - 금욕과 미신 - 다양한 많은 우상 - 제사장들의 임무
28. 잔인하고도 더러운 유까딴 사람들의 인신공양과 고행 - 화살을 쏘아 인간 제물을 죽이다
29. 유까딴 사람들의 무기 - 군대의 장교들 - 병법과 병사들, 전쟁 풍습
30. 간음, 살인, 도둑질한 사람에 대한 징계와 형벌 -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 - 아이들의 머리를 평평하게 하는 관습(편두풍습)
31. 유까딴 여자 인디오들의 의복과 장식
32. 유까딴 여자 인디오들의 정절과 교육 - 그들의 높은 교양과 경제 - 출산과 관련된 신앙심과 특별한 관습들
33. 초상(初喪) - 제사장들의 매장 - 촌장들의 유골을 보관하는 조각상 - 조의 -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34. 유까딴의 연도 계산 - 날에 해당하는 문자들 - 네 명의 바깝과 그들의 이름 - 불길한 날들
35. 불길한 날들에 행하는 의례들 - 깐을 머리문자로 하는 새해의 공양
36. 물룩을 (머리)문자로 하는 새해의 공양 - 장대춤 - 흙으로 만든 개와 함께 추는 노파들의 춤
37. 익스(IX)를 (머리)문자로 하는 새해의 공양 - 불길한 예언과 그에 대한 대책
38. 까우악(CAUAC)을 (머리)문자로 하는 새해의 공양 - 불길한 예언과 그 대책으로써의 불춤
39. 달력에 대한 설명
40. 로마 달력과 유까딴 달력의 시작
41. 마야의 연도 - 그들의 문자
42. 유까딴의 많은 건축물 - 잇사말, 메리다, 치첸이트사의 건축물들
43. 인디오들은 왜 인신공양을 하였는가
44. 땅에서 나는 것들
45. 유까딴의 물고기
46. 이구아나와 악어
47. 뱀의 종류와 독을 가진 다른 동물들
48. 벌, 꿀, 밀랍
49. 유까딴의 식물
50. 육지와 바다의 새
51. 유까딴의 또 다른 동물들
52. 결론

참고문헌


지은이_디에고 데 란다

16세기 마야 지역에서 활동한 에스빠냐의 가톨릭 신부이다. 유럽 열강의 초기 식민지 개척 시대인 1549년 에스빠냐에서 멕시코로 건너가 그곳의 원주민 포교와 저술 활동에 힘을 쏟았다. 당시의 마야 지역은 1520년대 이후 에스빠냐 몬떼호 장군에게 정복되기 시작하여, 1540년대 이후로는 이미 많은 지역이 복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저자인 란다 신부가 이곳에 도착했을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성당이 생기고 포교가 시작되고 있었다. 란다 역시 1552년 유까딴 지역의 과르디안(주임신부)으로 부임해 마야 원주민들과 인연을 맺었다. 포교를 위하여 신부들은 마야 원주민의 언어와 관습에 특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란다도 그러한 필요 때문에 그들의 생활과 언어를 공부했다. 란다는 원주민들과 가까이 지내며 교류했지만, 그들의 인신공양과 우상숭배 풍습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 란다는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으로 마야문명에 관한 자세하고 광범위한 글을 남겼으나, 우상숭배라는 죄목으로 수많은 원주민을 화형에 처했으며, 마야문자로 기록된 문서를 모조리 불태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란다는 마야의 문화를 파괴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동 때문에 고발당하고 에스빠냐로 소환되어 조사까지 받았으나 관련자들을 설득하여 결국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은 이러한 과정에서 란다의 경험과 호기심, 실제적인 필요로 탄생했다. 1573년부터는 당시 유까딴 지역 가톨릭의 최고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메리다의 오비스뽀(주교)로 임명되어 활동하다 1579년 멕시코 메리다에서 사망했다.


옮기고 엮은이_송영복

1991년 경희대학교 스페인어학과를 졸업하고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에서 멕시코사 석사와 메소아메리카학 박사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스페인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마야문명에 관한 방대한 내용을 정리한 마야 연구서 《마야(Los Mayas)》를 출간하는 등 국내 독보적인 마야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 밖의 지은 책으로 《마야 루트》 《라틴아메리카 강의 노트》 《멕시코의 인디오》 《라틴아메리카》(공저) 등이 있다.


책 내용

머리말_멕시코와 과테말라, 주변 마야 국가들의 역사와 문화, 그들의 삶과 정치경제,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지겹게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바로 유럽 사람들에게 정복당한 그날이다. 그 당시 죽음과 고통에 젖은 애절한 사연, 정나미 뚝뚝 떨어지는 현실, 사실의 기록, 악랄함과 사랑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이 역사에는 첫 키스 같은 짜릿함과 이어지는 배신의 광란이 있다.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은 그들 역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가장 큰 흉터이자 가장 극적인 순간의 생생한 증언인 셈이다._송영복 (저자)

유까딴의 정부, 제사장, 과학, 문자와 책_이러한 마야의 책은 지금까지 일부만 남아 있으나 그 수는 많지 않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꼬디쎄 드레스데(C?dice Dresde)’ ‘꼬디쎄 마드리드(C?dice Madrid)’ ‘꼬디쎄 빠리(C?dice Paris)’로 세 권 정도에 불과하다. 그 수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책들은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상당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에스빠냐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에 도구로 여겨졌기 때문에 탄압의 대상이었다. 그 후 마야의 책들을 제작하거나 보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었고, 발견되는 즉시 모두 불태워졌다._[87쪽]

정복 이전 유까딴에서 발생한 많은 재난 : 태풍, 역병, 전쟁 등_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힘을 내어서 건축물들을 짓고 땅을 경작하였으며 많은 자손을 번창시켰다. 그렇게 이곳 사람들은 좋은 기후에서 16년 동안 건강한 삶을 누렸다. 특히 마지막 해는 그 어느 해보다 더욱 풍요로운 해였다; 그런데 열매를 막 수확하려고 할 즈음에 전염성 열병이 창궐하였다. 이 열병은 24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역병이 돌고 난 후로 병에 걸린 사람들의 몸이 퉁퉁 붓기 시작하였다. 사방에서 구더기가 들끓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이 역병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열매 대부분은 수확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_[102쪽]

원주민에 대한 에스빠냐 사람들의 잔인함_에스빠냐 사람들은 인디오들에게 전대미문의 잔혹한 행위를 벌였다. 코와 팔다리를 베어 내는가 하면 여자 인디오들의 유방을 도려내었고, 발에 호박을 묶은 채로 깊은 호수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엄마들처럼 잘 걷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린아이들을 창으로 찔렀으며, 목쇄를 질러서 인디오들을 이동시키는 도중에 누군가 병이 들거나 다른 사람들처럼 잘 걷지 못하면 전체 행렬을 멈추고는 그 사람만 풀어놓는 수고로움을 피하려고 목을 베기도 하였다. 그들은 노동 목적으로 수많은 남녀-포로를 이와 같은 방법으로 데리고 왔다._[132쪽]

인디오의 나쁜 습관들_이처럼 신부들이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가르침을 주고, 젊은이들을 교육했음에도 인디오들은 우상숭배를 주관하던 제사장과 촌장들에 의하여 다시 타락의 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공양을 다시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공양에서 단순히 향을 피우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피를 바쳤다. 그리하여 신부들은 종교재판을 열었고, 알깔데 마요르(도지사)에게 도움을 청하여 수많은 사람을 잡아들였다. 그러고는 종교재판 형식에 준하여; 죄수들이 쓰는 고깔을 씌운 후 그들을 처형대로 보냈다._[150쪽]

인디오의 그림과 문신_장인(匠人)들은 원하는 부위에 잉크로 그림을 그려 넣고, 그림 부분을 조심스럽게 찔러서 피와 잉크가 몸에 문신으로 새겨지도록 하였다; 엄청난 통증이 뒤따랐기 때문에 한 번에 조금씩만 문신을 하였다. 끝나고 난 다음에도 그 부위에 염증과 고름이 생겨서 계속해서 고통스러워하였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문신하지 않은 사람들은 조롱당하였다. 인디오들은 자신들이 유쾌하고, 복을 타고났으며, 천부적인 재주가 있음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였다._[177쪽]

잔인하고도 더러운 유까딴 사람들의 인신공양과 고행_볼에 구멍을 내기도 하였고, 아랫입술에 내기도 하였으며; 몸 일부에 상처를 내기도 하였다; 혀의 양옆으로 비스듬하게 구멍을 내서 지푸라기를 통과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하는 데는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다; 또한 부끄러운 부위인 남성 성기의 포피에 상처를 내서 귀에서처럼 증표를 남겨 두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할례의식을 한다고 인디아스의 역사가가 착각하였다. 그 밖에도 인디오들은 더럽고도 처참한 공양을 하였다. 피공양을 할 남자들은 신전에 모여 차례대로 서서 각자 성기의 측면으로 비스듬한 구멍을 냈다. 가능한 많은 실을 (구멍으로) 통과시켰고, 그리하여 모든 남자의 성기는 실에 꿰어진 상태가 되었다; 모든 사람의 성기에서 낸 피로 악마를 문질렀는데, 가장 많이 한 사람이 가장 용감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자식들 또한 어려서부터 이러한 일에 익숙해졌다._[217쪽]

간음, 살인, 도둑질한 사람에 대한 징계와 형벌_간음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이곳 사람들 관습은 마야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조사 결과 간음을 저질렀다고 판단되면 마을의 어른들이 촌장의 집에 모여서 간음한 남자를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그를 나무 막대기에 묶어서 죄를 범한 여자의 남편에게 데리고 갔다; 만일 여자의 남편이 용서하면 죄인의 몸이 자유롭게 되었으나, 그렇지 않으면 높은 곳에서 죄인의 머리 위로 커다란 돌을 떨어뜨려서 사형에 처하였다; 여자들의 경우에는 그 죄로 인한 불명예가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죗값을 치르기에 충분하였다._[233쪽]

달력에 대한 설명_달(月)에 포함된 각각의 날(日)에는 앞서 이야기한 인디오들의 문자로 이름이 붙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달(月)이 모두 모여서 일종의 달력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달력으로 그렇게 하듯이 (인디오들도 그들의 달력으로 의례를 행하고 계산과 계약하였으며 거래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달력은 한 해의 첫날이 아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달력과는 차이가 있다. 이것은 달(月)에 포함된 날(日)을 모두 함께 계산해야 하는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여기에 제시할 그들의 고유달력을 보면 알겠지만; 달(月)에 포함된 문자와 날(日)은 각각 20개인 반면 달력의 날짜를 셀 때는 1부터 13까지만 세던 관습이 있었다._[284쪽]

마야의 연도_전에도 이야기하였듯이 인디오들은 연도와 달(月)을 계산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대에 따른 날짜와 시간을 계산하는 특별한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는 20년을 20씩 세어 나가는 것으로 1 아하우라고 불리는 날들에 해당하는 20개의 문자 중 하나로 13을 20씩(13×20) 계산하는 것이다. 다음의 원에서 볼 수 있듯이 차례가 없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세어 나간다. 이것들은 인디오들 말로 까뚠들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놀라울 정도로 그들의 나이를 잘 계산하였다. 그래서 첫 장에서 이야기한 노인 역시 300년 전 일을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내가 이러한 그들의 계산법을 알지 못했다면 오래전 일들을 그렇게나 쉽게 기억하는 것을 믿지 못하였을 것이다._[330~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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