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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정신의 산실 ‘명륜동 가옥’, 경희의 품에 안기다

2017-06-28 교육

명륜동 가옥 안채(한옥 좌측은 서재, 우측은 설립자 침실, 1960년대)

설립자 고 미원 조영식 박사 유족, 명륜동 가옥 및 부지 학교법인에 기부
60여 년간 ‘학문과 평화’ 초석 쌓은 곳, 경희정신 이어가는 뜻깊은 장소되길

“‘문화세계 창조’와 ‘평화로운 인류사회 건설’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경희학원 설립자 故 미원(美源) 조영식 박사님의 뜻을 기리고, 새 시대 지속가능한 문명 창달을 위한 경희대학교의 학술 및 교육, 실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아래 부동산(토지와 건물)을 학교법인 경희학원에 기부합니다.”

지난 6월 21일 오후 서울캠퍼스 본관 대회의실. 2017학년도 1학기를 마무리하는 합동교무위원회가 열리기 직전, 경희의 역사와 미래를 되새기는 뜻깊은 자리가 마련됐다. 설립자 고 미원(美源) 조영식 박사(1921~2012)가 고향 평안북도 운산에서 월남해 1955년 이래 60여 년간 거주한 서울 종로구 명륜동 가옥과 부지를 유족들이 학교법인 경희학원에 기부했다.

조인원 총장으로부터 기부증서를 전달받은 공영일 경희학원 이사장은 “명륜동 가옥은 경희의 역사가 담긴 곳이지만, 자제분들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곳인데, 그런 가옥과 부지를 법인에 기증해주셔서 감사하다”면서 “평생을 대학발전과 평화운동을 위해 헌신하신 설립자의 뜻을 기리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초기 역사 담긴 곳

서재(1960년대 중반) / 서재 앞 뒤뜰에서 설립자 내외(1960년대 중반)

명륜동 가옥 및 부지가 경희학원의 품에 안긴 것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명륜동은 경희정신이 싹튼 ‘작은 회기동’이었기 때문이다. 고황산 기슭 서울캠퍼스뿐만 아니라 설립자의 자택에서도 경희의 역사와 전통이 시작됐다.

창학 초기 명륜동 가옥은 설립자와 설립자 가족의 추억이 담긴 사저에 머물지 않았다. 명륜동 자택은 경희의 미래가 설계된 집무실이자 국내외 내방 인사를 맞이한 영빈관이었고 각종 학교 행사가 열리던 또 다른 캠퍼스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곳, ‘학문과 평화’의 산실이 대학과 인류의 미래를 위해 경희의 공적 자산이자 역사적인 공간으로 이름을 갖게 됐다.

기부증서 전달식에 이어 경희기록관 김희찬 관장(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이 설립자의 명륜동 자택에 얽힌 경희의 초창기 역사를 관련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경희는 1951년 피란지 수도 부산에서 신흥초급대(1949년 설립)를 인수, 부산 동광동에서 ‘문화세계의 창조’를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1953년 1월 화재로 인해 동광동 교사가 전소됐다. 그해 봄 부산 동대신동 산비탈에 판자 건물 몇 채로 지어진 교사를 다시 건립했지만, 바로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피란을 내려왔던 대학들이 속속 상경했다. 그러나 경희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서울에 두고 온 교사도 없었고, 서울에 부지를 장만할 경제적 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맨손’으로 시작한 서울캠퍼스 마스터플랜

서울캠퍼스 전경(1954년)

1953년 가을, 설립자는 서울로 올라와 홍익대 인근 와우산, 삼청공원, 우이동, 자하문 밖, 하월곡동 등을 답사하며 학교 부지를 물색하던 끝에 현 회기동 일대를 ‘문화세계의 창조’를 위한 터전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당시 회기동 일대는 벌거숭이와 같은 구릉과 산, 벌판으로 인가가 거의 없는 척박한 땅이었다.

설립자는 전쟁 직후 먼 미래를 내다봤다. 국내 대학으론 처음으로 캠퍼스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다. 당시 마스터플랜에는 본관 석조전을 비롯해 현재 서울캠퍼스를 구성하는 주요 건물과 조경, 조림 계획이 포함돼 있었다.

본관 공사 현장(1955년 경)

문제는 재정이었다. 미래는 원대했지만 ‘맨손’이었다. 설립자는 단돈 8만 환(당시 서울에 출장해 10일간 머물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을 들고 고황산 기슭에 본관 석조전을 짓기 시작했다. 1956년 본관 1차 공사가 마무리될 때, 공사에 들어간 비용은 총 4억5천여 만 환에 달했다. 빚으로 본관 건물을 쌓아올려, 공사 기간 내내 채권자들의 독촉이 이어졌다.

공사가 막바지에 접어들던 1955년 가을, 설립자는 당시 거주하던 혜화동 자택을 처분해 부채 일부를 갚았다. 그리곤 인근 혜화동 소재 자그마한 가옥에 세를 들어 모친을 포함한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서 거주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고통은 빚 독촉이었다. “경희대(당시 신흥대학)가 망했다.” 그런 소문이 장안에 퍼지자 당시로선 매우 야심찼던 본관과 캠퍼스 공사는 일시에 중단됐다.

결심이 필요했다. 설립자는 세를 든 혜화동 단칸방에서, 폐가에 가깝지만 더 크고 넓은 명륜동 주택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채권자들이 새로 이사한 명륜동 가옥에서 연일 빚 독촉 농성을 이어갔다. 훗날 설립자의 아내 오정명 여사는 ‘없는 살림에 농성하던 사람들의 삼시 세끼를 해결하고, 돈을 급히 구하러 동분서주하느라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었다’고 당시 상황을 술회했다.

우여곡절 끝에 설립자는 빚 청산을 위해 두 가지 결단을 내렸다. 농성하는 채무자들 앞에서 경희의 비전이 대학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이 사회, 이 세계를 위한 것이라는 평소 지론을 역설했다. 또 다른 편으론 채권자들에게 약속어음을 발행해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했다. 경희의 초기 건설 공사를 둘러싼 채무위기는 그렇게 일단락됐다.

그 후 설립자는 안정을 되찾았다. 폐가에 가까웠던 명륜동 집은 전통 한옥과 정원의 모습을 되찾았고, 이때부터 캠퍼스 건설도 속도를 냈다. 그 후 명륜동 가옥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명륜동 가옥은 월남한 설립자 가족의 최초의 안정된 보금자리이자, 공적 업무공간이 부족했던 신생 대학의 집무실, 회의실, 영빈관 등으로 활용됐다.

“경희의 더 큰 미래를 열어나가자”

뒤뜰에 초대된 교무위원과 학생 대표(1960년대 초)

당시 명륜동 주택에선 서울 시내 대학 총장이 함께 한 만찬 회의가 열렸고, 국제교류를 위해 내방한 세계대학 총장, 재미 경희후원회 인사와의 만남이 이어졌다. 교무위원, 학생 대표, 교직원도 명륜동 주택으로 자주 초대해 대학발전을 위한 소통의 자리를 마련했다.

김희찬 관장은 명륜동과 관련된 경희의 초창기 역사에 대한 소개를 마무리하면서 “명륜동 자택은 사적 공간이었지만, 설립자와 가족의 삶뿐 아니라 경희의 공적 역사와 정신이 녹아있는 곳이기도 하다”며 “설립자의 뜻을 기리고, 경희정신이 더욱 크게 뻗어나가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기부증서를 전달받은 공영일 경희학원 이사장은 “명륜동 가옥이 평생을 대학발전과 평화운동을 위해 헌신하신 설립자의 뜻을 기리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유족을 대신해 기부 약정식에 참석한 조인원 총장은 “명륜동 집은 38선을 넘어 월남한 가족에게는 고향과도 같았지만, 설립취지를 기리고자 기부하게 됐다”고 밝혔다. 조 총장은 이어 “지난 68년 역사와 함께 더 큰 미래를 향한 경희의 도전이 이어지길 희망한다”면서 약정 인사말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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