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국내 제일이 아니라 세계 제일의 대학으로!”

2015-07-22 교류/실천

설립자 미원 조영식 박사 1954년 학장 취임식 연설 육성 발굴…교내에서 가장 오래된 녹음 자료
종전 직후 폐허 위에서 지구적 차원의 미래 비전 선언


지난 6월 30일 오후, 국제캠퍼스 피스 홀.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합동교무위원회가 열렸다. 첫 순서로 김희찬 경희기록관장이 스크린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화면에 오래된 흑백 사진이 비춰졌다. 사진 속의 시간은 61년 전, 6·25 전쟁이 끝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1954년 5월 20일이었다. 서울캠퍼스가 들어서는 회기동 전경 사진에 이어 설립자 미원 조영식 박사(1921~2011)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한국에 있어서의 유일한 대학, 한국에 있어서의 어떠한 특정 대학을 흉내를 내서 그와 같은 대학을 만들고 싶다 하는 심정은 없습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것은 한국의 어느 대학보다도 동양적이요, 세계적으로 내놔서 첫째가는 제일 대학과 경쟁해야 되겠다. 그렇기 위해서는 … 저 사람들에 비해서 백배, 천배의 노력과 정성을 바치지 않아가지고는 아니 될 듯 생각됩니다.”



세계 최빈국 신생 대학에서 울려퍼진 ‘원대한 미래비전’
설립자가 학장에 취임하면서 구성원들에게 행한 연설이 ‘재현’되자 피스 홀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교내에서 가장 오래된 육성 녹음 자료가 처음 공개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1954년 당시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현재의 1/40 수준)에 불과했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그것도 단순한 최빈국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치열한 전쟁을 치러낸 국가인데다 분단된 상황. 무엇보다 가난과 싸워야 했다. 생존이 급선무였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암울한 시기에 경희는 ‘세계 제일의 대학과 경쟁하겠다’고 선언했다. 한반도를 넘어 50년, 100년 앞을 내다본 것이다. 

1954년은 경희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진 뜻 깊은 한 해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있던 대학들도 부랴부랴 부산으로 향했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 피란을 내려왔던 대학들이 일제히 서울로 복귀했지만, 우리 대학은 그럴만한 사정이 아니었다. 서울에 두고 온 교사도 없었고, 그렇다고 서울에 부지를 장만할 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란의 와중에 부산에 가교사를 짓느라 갖은 고생을 다했지만, 그마저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천신만고 끝에 부산 동대신동 산기슭에 가교사를 완공하고 새 출발을 하려는데 휴전이 된 것이다. 전쟁이 멈춘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새 캠퍼스로 옮긴 지 채 반년도 안 지난 시점이었다. 부산에 홀로 남아 서울로 복귀하는 대학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결단을 내려야했다.

설립자 먼저 서울로 올라와 서울 외곽을 돌며 부지를 물색했다. 그리고 고황산 기슭에서 마음을 굳혔다. 고황산 위에서 백년 뒤의 경희, 세계적인 경희를 설계한 것이다. 이듬해인 1954년 3월 24일 경희는 서울 동북부 회기동으로 이전했다. 세 채의 임시 교사를 지었다. 대학원(현 신문방송국)과 임시 사무실(중앙도서관 옆 봉수대 자리) 그리고 목조 임시 교사(현 문과대)가 건물의 전부였다. 그해 4월 15일 임시 교사에서 첫 개강식을 가졌다. 부산캠퍼스 시대를 마감하고, 세계적인 대학원(大學園)의 꿈을 펼칠 서울캠퍼스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피란지 부산에서 발아한 경희의 창학이념 ‘문화세계의 창조’와 교훈 ‘학원의 민주화, 사상의 민주화, 생활의 민주화’가 고황산 기슭에서 뿌리를 내리고 개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1953년 3월 신축된 부산 동대신동 교사.

건물 세 채, 5개 학과 학생 1천 명으로 서울캠퍼스 시대 개막
이번에 발굴, 공개된 1954년 취임사는 설립자가 대학 운영자로서 공식석상에서 행한 첫 연설이다. 취임사에는 취임 소감과 함께 대학의 당면 과제와 경희의 담대한 미래 비전이 담겨있다. 취임사에서 조영식 박사는 대학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구성원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협동과 단결을 통한 대학 발전을 요청하는 한편, “세계적인 대학” 건설을 향한 비전을 밝히고 있다.

설립자의 학장 취임식 연설이 녹음된 자료가 뒤늦게 발굴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경희기록관 수장고에는 학교 역사 관련 음성 릴-테이프 220여 개가 보관되어 있다. 경희기록관은 수년 전부터 이 릴-테이프에 대한 보존처리 및 디지털 변환 작업을 진행해왔는데 지난 1월, 음성 자료를 전면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학교 역사상 최고(最古)의 음성 자료를 발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1954년 5월 20일 설립자 조영식 박사의 학장 취임식 연설을 녹음한 릴-테이프였다.

그런데 왜 총장이 아니고 학장이었을까. 경희(당시 신흥초급대)는 1952년 12월 9일 4년제 단과대학 설립 인가를 받고, 1955년 2월 28일 종합대학으로 승격됐기 때문에 1954년 당시에는 총장이 있을 수 없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설립자의 학장 취임사는 당시 대내외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무모하리만큼 원대한 포부였다. 당시 경희는 지구상 최빈국의 신생 대학이었다. 그것도 서울로 이전한 지 2개월 밖에 되지 않은 초라한 대학이었다. 국문학과, 영문학과, 법률학과, 정치학과, 체육학과 등 5개 학과에 전교생이 1,040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설립자는 목조 임시 교사에서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세계 제일의 대학과 경쟁해야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다. 당시 설립자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우리 손에 의해서 결정지어지는 것이지, 우리 손에 의해서 해석되는 것이기 때문에 … 우리가 … 목표를 지향해서 (함께 노력한다면) …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한 번 더 기억하면서 여러분들한테 부탁합니다.”

학장 취임식이 있던 그해, 경희는 실제로 원대한 비전을 구체화했다. 국내 대학 최초로 캠퍼스 마스터플랜을 수립한 것이 그 좋은 예다. 현재 서울캠퍼스의 본관, 대운동장, 도서관, 문과대 등 주요 건물은 그때 만들어진 마스터 플랜과 큰 차이가 없다. 캠퍼스 인프라 차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후 경희는 학술기관으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사회기관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선구적 노력을 기울여 왔다. 

“특정 대학을 흉내내지 않겠다”, “운명은 우리 손에 의해 결정된다”던 설립자의 학장 취임 연설은 이후 하나하나 실현돼 왔다. 1960년대 스러져가던 한의학을 되살린 데 이어 경희의료원을 설립하고 세계 유일의 종합적인 의과학 체계를 수립했다. 1980년대 들어 국제캠퍼스와 광릉캠퍼스로 확장되면서 경희는 인문사회, 자연과학, 의학, 공학, 예술, 체육을 아우르는 국내 굴지의 명문사학으로 성장했다. 경희는 사회 공헌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학문과 평화, 학술과 실천의 결합으로 상징되는 경희의 빛나는 전통은 창학 초기부터 활발했고, 또 매우 남다른 것이었다.

목조 임시 교사

‘미래대학리포트’ ‘미래전략2020+’의 뿌리가 학장 취임 연설
1950년대 후반의 농촌계몽운동과 잘살기 운동, 1965년 세계대학총장회(IAUP) 설립 주도, 1981년 UN 세계평화의 날(해) 제정 주도, 1985년 평화복지대학원 설립, 1986년 <세계평화대백과사전> 편찬, 1999년 NGO세계대회, 2009년 세계시민포럼(WCF) 및 세계시민청년포럼(WCYF) 창립 외에도 1970년대 이후 밝은사회운동, 네오르네상스운동 등을 통해 대학의 사회적 책임을 지구적 차원으로, 또 평화적 차원으로 확대시켜왔다. 특히 고등교육과 세계평화 운동의 결합은 전 세계 대학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선구자적인 것이었다.

지난 6월 30일, 합동교무위원회가 개최되기 직전, 교무위원들에게 6월 초에 최근 발간된 <미래대학리포트>가 배포됐다. 그리고 설립자의 학장 취임식 연설이 소개된 데 이어 <미래전략2020+>에 대한 설명이 진행됐다. ‘경희 100년 미래메시지’ 50주년을 기념해 구성원의 꿈과 희망을 수렴한 <미래대학리포트>와 중장기 발전전략을 새로 업그레이드한 <미래전략2020+>가 설립자의 학장 취임 연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었다. 경희의 담대한 미래를 구현해낼 <미래대학리포트>와 <미래전략2020+>의 한 발원지가 61년 전, 목조 임시 가교사에서 행해졌던 설립자의 학장 취임 연설이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경희의 오늘과 내일은 경희의 66년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설립자의 학장 취임 연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경희의 미래는 언제나 저 ‘거대한 뿌리’, 경희의 설립이념에서 시작된다. 경희가 더 높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희기록관) 

1956년 공중에서 촬영한 서울캠퍼스 옛 모습
1954년 수립된 서울 캠퍼스 마스터 플랜

   

▶녹취록 전문   ▶음성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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