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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 초청 특강 '21세기에 다시 보는 해방후사 ③'

2011-11-25 교육


 6.25 전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
“북침설·함정설은 증거 불충분한 주장이며 폐기돼야 한다”
 
1980년대에 미국의 몇몇 역사학자들이 종래의 남침설을 뒤집고 남한이 먼저 북한을 공격해 6·25전쟁이 발발했다는 북침설을 제기했다. 이 이론은 한국 사회의 변혁운동과 맞물려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6·25전쟁의 실체는 무엇인가. 북한의 남침일까, 아니면 남한이 미국과 음모를 꾸며서 북한을 선제공격한 것일까.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이정식 명예교수가 해답을 내놓았다. 지난 11월 23일 서울캠퍼스 오비스홀 111호에서 개최된 ‘2011 석학 초청 특강’ 세 번째 강연에서 이정식 명예교수는 “북침설은 증거가 허약하며, 확고한 증거로 증명할 수 없는 가설(hypothesis)은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연 첫 머리에서 이정식 명예교수는 북한 방문 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북침설을 주장하는 영화를 관람한 뒤 북한 안내원에게 “누가 전쟁을 시작한 것이냐”고 묻자 “우리가 어떻게 미제를 이길 수 있는가. 미제가 먼저 공격했다는 증거가 많다”고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북한에는 6·25 관련 자료가 많이 있다. 이른바 ‘노획 문서’다. 전쟁이 나자마자 서울이 함락되는 바람에 이승만 정부가 자료를 수습하지 못한 채 서둘러 피난을 가야 했기 때문에 고스란히 북한의 손에 넘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6·25 관련 자료는 미국에도 산더미만큼 쌓여 있다. 인천상륙 작전에 성공한 후 압록강까지 진격하면서 동사무소에서 수상 관저까지 샅샅이 뒤져 노획한 문서들이다. 문제는 자료들의 증거 능력이다.
 
북침설은 가공의 문건에 기초한 상상력의 산물”
북침설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서 노획한 2개의 문서에 크게 의존하는 주장이다. 하나는 1949년 10월 20일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교수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이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일본 도쿄에서 ‘이 대령(Colonel Rhee)'이라는 직함으로 워싱턴에 있는 굿펠로(Goodfellow) 대령에게 보냈다는 전보 내용이다.
 
로버트 올리버는 펜실베이니아대학(State College of Pennsylvania) 교수로 이승만의 자문역을 맡아 두 사람 사이에는 편지 왕래가 잦았다. 편지에는 이승만의 심정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이승만은 “소련은 냉전에서 이기고 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세력을 더 키우기 전에 북한에서 공산당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정식 명예교수는 “이승만이 북한을 공격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의 입장은 달랐다”고 말했다. “로버트 올리버는 이승만의 생각이 미국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며, 북한을 공격하자는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말라는 답장을 보냈다”는 것이다. 또 “당시 이승만이 올리버 교수에게 쓴 편지는 워싱턴으로 보내졌으므로 북한이 가지고 있다는 편지는 사본에 불과해 증거 능력이 약하다”고 비판했다.

다음으로, 이승만이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도쿄에서 극동미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만나 북침 계획을 꾸몄다는 ‘음모설’에 대해서는 “당시 맥아더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미국 정부도 3차 대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주장했다. 1945년 10월 13일 이승만이 도쿄에서 굿펠로 대령에게 보냈다는 전보와 관련해서는 “원본이 보관돼 있다는 후버기념도서관(Hoover Institution Archives)에 문의한 결과, 한 박스를 다 뒤졌지만 그런 전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신이 돌아왔다”면서 “맥아더·이승만 음모설은 가공의 문건에 기초한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반박했다. 북침설을 뒷받침하는 주춧돌 한 개가 빠진 만큼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의 논리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6·25전쟁의 수수께끼와 관련해서 또 하나 등장하는 것은 이른바 ‘함정설’이다. 이승만이 미국과 짜고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도록 함정을 팠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이정식 명예교수는 “전쟁이 난 후 불과 2개월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해 정부를 제주도로 옮겨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는데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위험한 함정을 파는 어리석은 사냥꾼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지금까지도 북침설을 주장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이정식 명예교수는 “공산진영 내부 선전용”이라고 주장했다. 1950년 UN은 안보이사회를 열어 북한을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최초의 UN군을 한국전쟁에 투입했다. 따라서 북침설이 입증된다면 이 모든 조처들이 무효화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 증거들은 북침설을 부정하고 있지만 그런 주장은 적어도 공산진영 내부를 설득하고 동원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고 이정식 명예교수는 분석했다.   

미국은 왜 6·25전쟁에 참전했는가 
강연이 끝난 뒤 대전에서 올라온 한 여학생은 “미국이 한반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왜 6·25전쟁에 참전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정식 명예교수는 “원래 강연 원고에 있었지만 시간이 모자라 설명을 생략했었다”면서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갔다. “북한군이 예상외로 강했다는 점이 미국의 전략을 수정하게 만든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훈련이 잘 된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와 전투기로 무장하고 개전 2개월 만에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붙였다. 1949년 남한에 주둔했던 미군을 철수시킬 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남한이 소련에 점령당하는 것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침의 배후에 소련이 있으며 6·25전쟁이 세계 공산화의 전초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전쟁에 참여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한반도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한국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2시간 동안의 강연을 마치며 이정식 명예교수는 학생 청중들에게 학문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을 들려줬다. “한국 현대사는 여러 가지 일들이 서로 연관돼 있어 어느 한 가지 수수께끼를 풀면 다른 것들도 풀릴 수 있다. 그렇지만 역으로 말하면, 어느 하나를 풀었다고 해서 ‘진실은 이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교훈이다. 이정식 명예교수는 “한국 현대사 관련 자료는 많은 부분이 전쟁 중에 불타 없어지고 당시를 경험한 증인들도 상당수가 사망했기 때문에 ‘궁핍한 역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온갖 설이 난무할 뿐 진실을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전제한 뒤 “그럴수록 꾸준히 파고들어가는 학문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11 석학 초정 특강’ 마지막 강연 ‘6·25의 전화위복: 대한민국의 발전’은 오는 11월 29일 오후 3시 오비스홀에서 개최되며 강연이 끝난 뒤에는 라운드테이블이 이어진다. 패널은 김학준 단국대학교 이사장,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도정일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허동현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등 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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