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시민다움, 시민으로 살기’

2022-09-05 교류/실천

경희학원이 박영신 고황석좌를 초청해 특별강연·대담을 개최했다. 특별강연·대담은 일반에 공개했으며, 웹캐스트를 통해 생중계했다.

박영신 경희학원 고황석좌 특별강연·대담
“자신, 가족, 공동체와 세상의 삶에 대한 성찰적 관심·실천을 일상으로 가져와야”

대통령 선거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올봄 우리가 맞닥뜨린 두 사건은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시민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갖게 한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생각을 나누고 판단하고 투표권을 행사한다. 동족상잔의 상처를 안은 분단국에 사는 우리에게 전쟁은 남의 일이 아니다. 전쟁의 참상에 관심을 갖고 공분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시민의 역할을 다한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 6월 28일(화) 열린 ‘경희학원 고황석좌 특별강연·대담’에서 박영신 고황석좌는 ‘시민다움, 시민으로 살기’라는 주제로 강연하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들려줬다. 경희학원은 이날 특별강연·대담을 일반에 공개하고, 웹캐스트를 통해 생중계했다. 행사는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음악대학 1층 리사이틀홀에서 개최됐다. 박 석좌는 현재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이며, 한국인문사회과학회·한국사회이론학회·한국사회운동학회 초대 회장, 녹색연합 상임대표, 사단법인 녹색교육센터 이사장을 역임했다.

“어떤 삶의 지향성을 갖느냐가 중요하다”
박 석좌는 ‘일상인의 삶’과 ‘시민의 삶’을 대비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일상인은 오늘도 먹고살기에 바쁜 하루를 살아간다. 더 배불리 먹고 더 여유롭게 살기 위해 온 힘과 열정을 쏟는다. 그들의 삶터는 전쟁터와 다름없다. 경쟁 논리를 앞세운 경합과 각축의 장, 자기 득세를 향한 진격의 장이다. 이런 인식은 이웃과 동료를 서로 돕고 도와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툼의 대상으로 여기게 한다. 일상인은 삶의 쳇바퀴가 한없이 단조롭고 힘들어도 거기에 자신을 맞출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다독인다. 비좁은 의식의 틀에 갇혀 다른 삶을 그리지 못한다.

반면에 시민은 이런 일상을 뛰어넘는다. 집안과 직장에 묶인 사사로운 삶에 맞서고자 분투한다. 시민의 관심은 자기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가족, 직장, 국가를 넘어 지구 공동체까지 확장된다. 자기라는 울타리를 넘어 공동의 선을 위해 참여하고 기여하는 삶의 지향성을 갖는다. 박 석좌는 “어떤 삶의 지향성을 갖느냐가 중요하다. 공동체에 책임 있게 참여하는 ‘시민다움’을 가질 때 일상인과 구별되는 시민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민다움’의 개념은 서로에 대한 공감 능력을 도덕 감정의 핵심이라고 한 애덤 스미스, 사회의 결속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계약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와 도덕성이라고 한 에밀 뒤르켐의 사회학 이론에 닿아있다. 도덕을 바탕으로 공공의 선을 향한 지평을 넓혀가는 시민다운 시민이 갖는 자질이 ‘시민다움’이다.

박영신 고황석좌는 ‘시민다움, 시민으로 살기’를 주제로 강연하면서 “일상인과 시민은 어떤 삶의 지향성을 갖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공동체에 책임 있게 참여하는 ‘시민다움’을 가질 때 일상인과 구별되는 시민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초월의 감수성으로 도덕에 뿌리내린 삶을 살아갈 때 시민이 된다”
일상인은 왜 시민다움이 결여된 삶을 살게 됐을까? 박 석좌는 “우리 사회가 산업화 이후 경제 논리에 잠식당하면서 다른 의미의 삶이 퇴색했다. 모든 것을 물질 가치로 환원하는 질서가 형성됐고, 모든 관심은 자신이 누리고자 하는 물질의 부에 쏠렸다. 지배 세력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배불리 먹고살기 위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정치와 윤리를 상품화하고, 공공 이익에 관한 논의도 돈으로 셈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비판에 그치지 않고 근원적인 해법을 찾아 나섰다. 자신, 가족, 공동체와 세상의 삶에 대한 성찰적 관심과 실천을 일상으로 가져오기를 권유했다. “시민다움은 나와 다른 이웃, 동료 시민에 대한 공감과 소통에서 싹튼다. 모든 것을 상품화해 판단하는 ‘삶의 비속화’에 저항하면서 형성된다.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좋은 이웃으로 살기’를 일상의 대화 주제로 삼아 생각을 나눠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시민다움을 익힐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다. 박 석좌는 “초월 차원에 잇대지 않고서는 일상에 얽매인 삶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서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의 이야기를 전했다. 하벨은 체제의 선전·선동이 만들어낸 거짓된 삶에 경종을 울렸다. 먹고사는 일상에 빠져 체제가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해 어떤 물음도 제기하지 않는 삶에서 벗어날 것을 주창하며 시민의 책임을 강조했다. 하벨이 말하는 시민은 거짓된 삶을 강요하는 힘에 맞서고, 진리를 위해 싸운다. 진리는 초월과 잇대어진 삶이다. 타자와 세계, 자연, 우주를 향한 초월의 감수성으로 도덕에 뿌리내린 삶을 살아갈 때 시민이 된다.

“더 넓은 의식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전환 계기 만들어야”
이날 박 석좌는 시민의 정의를 다시 썼다. “우리는 오랜 투쟁의 역사를 통해 시민의 권리를 갖게 됐는데, 시민의 권리를 누린다고 해서 진정한 시민이 됐는지 묻고 싶다”고 반문한 그는 “시민은 권리만 갖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선을 위해 이바지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이웃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는, 공동의 선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시민”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군가는 시민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정의했다고 핀잔할 수 있지만, 우리가 그리는 사회는 시민다움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을 때 가능해진다”고 강조하면서 “시민으로 살기 위해선 통상적으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자기 편리와 이익을 내던지는 ‘자기 재구성’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통상적 삶의 옹졸한 의식 세계를 벗어나 더 넓은 의식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 계기는 모든 문명권의 초월적 가치 안에 숨어 있다”고 설명했다.

문명의 역사에서 초월 영역에 기대어 비판하고 저항하면서 만들어낸 변혁의 계기를 되새겨 이 시대가 안고 있는 한계를 돌파하자는 의미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기원전 천년기 어느 시점에 문명 변혁의 계기가 된 초월성이 유교, 불교, 기독교, 고대 철학 등에서 동시다발로 나타났다고 했다. 야스퍼스는 그 시기를 ‘축의 시대’라고 불렀다. 박 석좌는 축(軸)의 초월성이 모든 문명권 정신의 저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를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해왔다.

박 석좌는 “시민은 권리만 갖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선을 위해 이바지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이웃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는, 공동의 선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시민”이라고 말했다.

“산업화 이후 깊이 뿌리 내린 경제 논리를 녹색·환경·생태 논리로 다시 체제화해야”
이어진 대담에서 진행을 맡은 엄규숙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는 사회학자이자 시민운동가, 목회자로 활동하면서 독자적 학문 세계를 구축하고, 학문적 성취와 공적 실천을 연결해온 박영신 석좌의 활동을 소개했다. 박 석좌는 고전사회학 이론에 기반하되 주체적으로 성찰하는 사회학을 모색해 윤리적 차원을 강조하는 성찰적 사회학, 도덕학문으로서 사회학을 강조했다. 도덕학문으로서 그의 사회학은 현존 질서의 합리성을 질문하고 넘어서도록 추동하는 궁극의 준거로서 초월의 지평에 관한 비전을 중시한다. 그는 이 같은 전환적 사유를 환경운동을 비롯한 시민운동의 장과 연결하려 노력하고 있다.

엄 교수는 특히 시민운동가의 활동에 주목하면서 “환경과 생태는 장기적으로 보면 인류와 지구 전체의 문제로 볼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 보면 이해득실의 대상이 된다. 이 때문에 지역, 특정 집단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고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며 문제 해결을 위한 조언을 요청했다.

박 석좌는 “시민운동으로 단숨에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산업화 이후 오랜 시간 깊이 뿌리 내린 경제 논리를 녹색·환경·생태 논리로 재체제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방관해선 안 된다. 지역, 국가 등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공동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시민의 양심에 기대어 호소해야 한다. 우리는 주어진 현실을 추종하거나 순응하는 대신 비판과 긴장 관계에 놓고, 끊임없이 극복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 노력이 자기 세계를 넓히고 공공의 선에 기여하는 삶의 기회를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나와 타인, 자연, 우주 관계를 살피고, 기댈 수 있는 관계 만드는 것이 의미 있는 삶”
엄 교수는 공공의 선을 향한 시민 의식의 중요성에 공감한 뒤, “하지만 정치는 코로나 팬데믹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근거 없는 가짜 뉴스로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정치 세력이 등장했는데, 이런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라고 질문했다.

박 석좌는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와 세계 곳곳의 현실 정치는 인간의 저급한 욕망에 호소하고 있다. 저급한 정치를 넘어서는 것은 인간의 고결한 마음에 호소하는 길밖에 없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사람에게 투표권을 행사하는 저급한 정치가 아니라, 시민다움이 만나서 결속하고 그것이 정치로 이어지는 고결한 정치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면서 “그런 정치는 우리가 지금 눈에 보이는 이상의 것, 현실 너머를 그리는 마음가짐으로 미래를 공유하고 있을 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엄 교수는 “경희학원 설립자 미원(美源) 조영식 박사는 저서 『문화세계의 창조』(1951년 5월 18일 발행)에서 인간과 자연, 우주의 근원적 성찰을 통해 이념 대립과 갈등, 틀의 제약과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인류 보편가치를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 강의에서 나온 초월의 개념에 맞닿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교육·학술기관에 요구하는 역할은 삶의 가치를 향하기보다 사회 진출을 지원하는 것”이라며 이 간극을 극복할 방법을 물었다.

박 석좌는 “경희학원 설립자가 쓴 경희대학교의 교가에 ‘인류’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온다. ‘인류 위해’라는 가치는 경희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시민다움, 생태주의가 긴밀하게 이어져 있는 중요한 가치인데, 학생들은 졸업 후에 먹고사는 문제의 다급함에 쫓겨 ‘인류, 생태주의, 지구 공동체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이야기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우리 학생들에게 한 번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먹고사는 것에 얽매여서 살 것인가, 아니면 더 귀한 삶의 지향성을 향해 고뇌하고 성찰하면서 살 것인가를 고민해봤으면 한다. 대학에서 말하는 나와 타인, 자연, 우주의 관계를 살피고, 서로 기댈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대담에서 박 석좌는 “‘인류 위해’라는 경희의 가치는 시민다움, 생태주의가 긴밀하게 이어져 있는 중요한 가치인데, 학생들은 졸업 후에 먹고사는 문제의 다급함에 쫓겨 ‘인류, 생태주의, 지구 공동체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이야기한다. 우리 학생들에게 한 번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경희학원, 고황석좌 특별강연·미원렉처 등 대중강연으로 성찰적 전환 의식·실천 의지 확산
경희학원은 전환의 시대를 맞아 새 시대, 새로운 인식과 실천의 지평을 열기 위해 고황석좌 제도를 신설했다. 학술, 국제협력, 시민사회 등의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거둔 석학을 고황석좌로 위촉해 지구사회가 맞이한 긴급한 위기 상황을 헤쳐나갈 힘과 지혜를 모아나간다. 고황석좌 특별강연을 비롯해 유엔 세계평화의 날 기념 Peace BAR Festival, 미원렉처 등 국제 학술대회와 특강 시리즈를 일반에 공개해 석학, 전문가, 실천가의 문제의식과 지적 사유를 나누고, 성찰적 전환 의식과 실천의 세계를 열어가고자 한다.

경희의 대표적인 특강 시리즈인 미원렉처는 기포드 렉처(Gifford Lecture) 형식으로 개편할 계획이다. 기포드 렉처는 설립자의 뜻에 따라 가치와 이상을 공유하면서 계승·발전해온 강연으로 일반 대중에게 열려 있다. 한나 아렌트, 노암 촘스키, 칼 세이건, 닐스 보어, 아놀드 토인비 등 세계 지성이 강연자로 참여했으며, 강연 내용은 책으로 출판해 세계시민과 공유하고 있다.

글 오은경 oek8524@khu.ac.kr
사진 정병성 pr@khu.ac.kr

ⓒ 경희대학교 커뮤니케이션센터 communication@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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